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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은 무엇인가 ㉖[기획 연재] 고영주 /(전) 거제지역자활센터 실장

14) 기본소득 아이디어의 역사 ⑧ : 제4의 물결

가이 스탠딩에 따르면 ‘제4의 물결’은 1986년에 ‘기본소득 유럽 네트워크(BIEN, Basic Income European Network)’의 창립과 함께 조용히(?)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현재진행형인 셈인데, 2010년대 들어 조용했던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졌고, 더군다나 COVID-19 팬데믹 상황에선 시대적 화두가 되어버렸습니다.

어쨌거나 이 흐름의 시작은 기술적 실업, 점증하는 불평등, 높은 실업률에 대한 우려, 마가렛 대처로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의 전면적 등장 등과 관련이 있습니다. ‘기본소득 유럽 네트워크’의 창립 이후 기본소득은 꾸준히 지지자들이 늘어났고, 특히 2007년부터 시작된 금융 붕괴를 거치며 실질적인 추진력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 시기부터 로봇공학•자동화•인공지능의 발전에 따른 노동의 대체에 대한 우려, 불안정 노동자의 증가, 커져가기만 하는 불평등 등의 문제들이 확연하게 불거져 나왔고,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기본소득 논의의 바탕에 깔리게 되었습니다. 이미 19세기 말에 알프레드 마셜이 “세계가 좁아질수록 승자의 수는 줄어든다”고 했던 예언 아닌 예언이 전 지구적 차원에서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스탠딩이 얘기했던 조용함은 기본소득 논의가 아무래도 일정한 지역이나 국가 내로 한정되거나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은 점,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베버리지•비스마르크식 복지가 대세였다는 점 그리고 개별적인 관심의 영역에 머무른 점 등과 관련되어 보입니다. 하지만 ‘기본소득 지구 네트워크’에서 소개하고 있는 ‘기본소득의 역사’를 살펴보면 유럽 네트워크의 창립 이전부터 북미 지역의 논의•논쟁과는 무관하게 간헐적으로 하지만 때로는 세차게 기본소득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 제4의 물결 ① : 덴마크와 네덜란드에서의 논쟁

197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미국에서는 ‘알래스카 영구 기금(Alaska Permanent Fund)’의 설립과는 별개로 보장소득은 거의 잊히고 말았습니다. 또한 이와는 별개로 대서양 건너 유럽에서는 덴마크,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등의 나라에서 기본소득 논의와 논쟁이 조용하고도 천천히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그 이전의 기본소득 역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전의 논의들과는 거의 관계없이 생겨났다고 보는 편이 정확한 것 같습니다. 이런 의문, 즉 “어떻게 과거의 역사와 단절된 채 비슷한 아이디어가 생겨날 수 있었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장면입니다.

덴마크에서는 1978년에 세 명의 학자들이 『중심부로부터의 반란』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시민 임금’이라는 명칭으로 기본소득을 제안하였는데, 전국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합니다.

유럽에서 기본소득에 관한 새로운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은 네덜란드였습니다. 암스테르담 자유대학 사회의학과 교수였던 퀴퍼(J. P. Kuiper)가 최초로 목소리를 냈습니다. 퀴퍼는 어떤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피폐해지고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과도한 노동으로 몸을 혹사당하고 있는 상황에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유급 노동(labour)’의 비인간적 본성에 대처하는 방법의 하나로 ‘고용과 소득의 고리’를 끊을 것을 제안했습니다. 사람들을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소득 보장’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어 1977년에는 네덜란드 기독민주당에서 떨어져나온 급진당(Politieke Partij Radicalen)이 자신들의 선거 강령에 기본소득을 포함시킨 유럽 최초의 국회의원 보유 정당이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네덜란드에서의 기본소득 운동은 노동조합 연합체인 네덜란드 노총(FNV, Federatie Nederlandse Vakbeweging, Federation of Dutch Trade Unions) 소속의 식품 분야 노동조합인 식품조합(Voedingsbond)의 지지로 인해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이 조합은 노동시간 단축과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행동을 시작했는데, 기본소득 관련 출판물을 냈을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의 기본소득협회를 자신들의 건물에 유치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눈여겨보아야 할 점 한 가지를 언급하자면, 이 조합의 구성이 여성과 시간제 노동자 비율이 높았다는 것입니다. 기본소득 찬•반 논쟁에서 찬성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은 쪽은 여성과 비정규직, 시간제 노동자들인 이유가 있겠지요. 이러한 경향은 기본소득 논의가 활발해진 21세기 들어서서도 이어집니다.

다시 돌아가면, 1985년에는 네덜란드 정부의 독립적인 싱크탱크인 ‘정부정책을 위한 과학위원회’에서 ‘부분 기본소득’ 도입을 제안한 보고서를 출간하면서 네덜란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이것이 적어도 네덜란드 내에서는 기본소득 논쟁의 첫 번째 절정이었습니다.

영국에서는 1984년에 ‘자원활동가 조직들의 전국위원회’의 후원을 받아 빌 조던과 허미온 파커 등을 중심으로 ‘기본소득 연구 그룹(BIRG)’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신자유주의 광풍이 시작된 국가였던 영국에서 이들의 노력이 주류 정치의 담론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독일에서는 1984년에 베를린 출신의 생태자유지상주의자인 토마스 슈미트(Tomas Schmit, 1943-2006)가 『그릇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출간하며 논쟁을 제기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프랑크푸르트대학교 공공재정학 교수인 요하임 미취케는 1985년부터 음의 소득세 형태로 시행되는 ‘시민소득(Bürgergeld)’을 지지하는 장기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989년의 베를린 장벽의 붕괴, 1990년 10월의 동•서독 통일이라는 시대적 대사건이 이러한 공개적 논의를 중단시키고 말았지요.

물론 사회학자 클라우스 오페(Claus Offe)나 프리츠 샤르프(Fritz W. Scharpf)와 같은 저명한 학자들의 논의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독일은 동•서독 통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난 다음인 2005년 무렵에야 다시 기본소득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의 논의는 상대적으로 늦게 시작되었습니다. 영향력 있는 좌파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앙드레 고르츠(André Gorz, 1923-2007)는 기본소득에 반대했던 처음의 태도를 바꾸어완전히 ‘유급 고용의 식민지’가 되어가는 사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면서 조건 없는 소득에 대한 지지로 돌아섰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좌파 기본소득 옹호론자들이 빼놓지 않고 거론하는 인물이 프랑스의 고르츠와 독일의 오페일 정도입니다. 특히 논문과 논쟁에서 이들의 이름은 매우 자주 등장합니다.

또 상당히 다른 측면에서, 자신을 “좌파 드골주의” 경제학자로 묘사한 요랑 브레슨은 ‘보편적 생존 소득’에 대한 복잡한 논의를 제공했습니다. 여기에다 ‘공리주의에 대항하는 사회과학운동(MAUSS)’의 지도자인 앨랭 카일레는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사람들에 대한, 그리고 집단적 이해관계 행위들에 쏟는 그들의 능력과 의지에 대한 사회의 근본적 신뢰의 표현으로서 조건 없는 소득을 옹호했고, 정치철학자인 장-마르크 페리는 완전 고용은 영원히 실현할 수 없다는 판단과 사회적으로 유용한 활동들을 지지하는 차원에서 유럽연합 차원의 시민적 권리로서 조건 없는 기본소득에 대한 진술을 발전시켰습니다.

○ 제4의 물결 ② : 유럽 네트워크의 창립과 지구 네트워크로의 전환

국가 내에서의 소소한(?) 논쟁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일어났던 시기에 ‘기본소득 유럽 네트워크’가 창립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참으로 신기하게도 이러한 논의들과 논쟁들에 기여한 지적 산물들은 기본소득의 역사를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기본소득 유럽 네트워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86년 9월 벨기에 루뱅의 신시가지에서 몇몇 나라의 조건 없는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모여 첫 모임을 조직했을 당시, 참가자들은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를 홀로 지지하는 줄로만 알았으며, 매우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관심에 ‘기분 좋게’ 놀랐다고 합니다. 이런 판단에 힘입어 기본소득 유럽 네트워크(BIEN)를 출범시키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기본소득 유럽 네트워크의 창립을 계기로 기본소득 옹호론자들의 접촉면이 넓어지게 되었고, 논의의 수준 역시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또 이후 유럽 네트워크는 정기적인 뉴스레터를 발간함과 아울러 2년마다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이어 남아프리카공화국, 호주, 뉴질랜드, 남아메리카, 미국 등의 자생적이면서 유럽 네트워크와 비슷한 네트워크들과의 접촉이 이루어지고, 유럽 네트워크 회의에 참가하는 비유럽인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거의 범지구적인 네트워크가 구축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드디어 2004년 9월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제10차 대회에서 ‘기본소득 유럽 네트워크(BIEN, Basic Income European Network)’를 ‘기본소득 지구 네트워크(BIEN, Basic Income Earth Network)’로 확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럽(European)’이 ‘지구(Earth)’로 바뀐 것입니다.

새롭게 창설된 ‘기본소득 지구 네트워크’가 유럽 바깥에서 개최한 첫 번째 대회는 2006년 10월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대학에서 열린 11차 대회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대 초에 윤정향, 성은미, 윤도현 등에 의해 학술 논의가 시작되었고, 이때는 주로 1997년 이후의 경제 위기와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에 대한 대안으로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소개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강남훈 교수를 비롯한 활동가들의 모임이 결성되었고, 2009년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에서 발간된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위하여’와 2010년 한국에서 개최된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를 기점으로 관심과 논의가 확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본소득 한국 네트워크(BIKN, Basic Income Korean Network)는 2009년에 설립되었고, BIKN은 2010년 BIEN의 제13차 총회에서 17번째 가입국으로 승인되었습니다. BIKN은 2010년 1월 27일에 「기본소득 서울 선언」을 발표하였는데, 다음은 선언문의 일부입니다.

“대중의 삶의 위기는 가중되는데, 자본과 권력은 대중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양보하라 한다. ‧‧‧ 누구도 희망의 끈을 놓으려 하지 않지만, 그 희망을 현실화할 수단은 여전히 안갯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해결할 대안이 절실하다. 위기의 폭이 넓고 깊은 만큼 우리에게 필요한 대안은 더욱 근본적이고, 간결하면서도 강력해야 할 것이다.”

○ 제4의 물결 ③ : 필리프 판 파레이스 그리고 너무 많은 사람들

제4의 물결은 현재진행형이고, 중요한 인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만 하더라도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 앵거스 디턴(Angus Deaton), 크리스토퍼 피사리데스(Christopher Pissarides),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등이 있고, 칼 폴라니의 외동딸이자 경제학자인 캐리 폴라니 레빗(Kari Polanyi Levitt) 교수도 기본소득의 열렬한 지지자입니다.

경제학자 가운데 BIEN의 공동의장을 맡았던 가이 스탠딩도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러함에도 제가 보기에 기본소득의 제4의 물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필리프 판 파레이스(Philippe Van Parijs)입니다. 파레이스는 이미 소개한 바 있는 『21세기 기본소득』의 저자이자 기본소득의 정의와 개념을 정립하고, 기본소득의 논리를 가장 치밀하게 논증(論證)한 사람입니다.

벨기에의 정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파레이스는 제가 이미 소개한 바 있는 기본소득의 철학적 이념인 ‘실질적인 자유’의 주창자이기도 하고, 기본소득의 역사를 정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본소득을 둘러싼 대부분의 쟁점들을 정리하였습니다. 야니크 판데르보호트와 공동으로 저술한 『21세기 기본소득』의 내용들을 논파해내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BIEN이 정의한 기본소득은 대체로 파레이스가 제시한 수준 이상으로 제안되고 있고 정리되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BIEN이 제시하는 원칙 다섯 가지의 원칙들(①주기성, ② 현금성, ③개별성, ④보편성, ⑤무조건성)을 모두 충족시키는 기본소득제가 도입되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기본소득은 무엇인가 ⑮’ 참고)

제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기본소득은 무엇인가 ⑯, ⑰’에서 살펴본 것처럼 좌파적 입장, 중간적 입장과 우파적 관점을 경합시키는 것이 아니며, 좌•우파의 딱지를 붙여가며 비난•비판하는 것은 더욱 아니라는 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 그러한 주장이 나왔는지, 해당 주장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지 등을 면밀히 살피는 것일 터이니 말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비단 저만의 것이 아니라 독일 기본소득 네트워크 내의 워크그룹인 ‘디지털화? 기본소득!’이 작성한 「프랑크푸르트 선언」에서도 나타납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기본소득 논의가 확산된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는 ‘디지털화’이며, 실리콘밸리의 유명 인사들이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기본적인 동기가 ‘파괴적인 기술 진전 속에서 일자리 없는 미래는 불가피하므로 고용 노동과 무관한 소득이 필요하다는 것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지요.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이 상황에서 시장 근본주의자이자 신자유주의 이론의 대부인 밀턴 프리드먼의 말이 떠오릅니다.

“실제 위기이든 인지된 위기이든 위기만이 진정한 변화를 일으킨다. 위기가 발생했을 때 내리는 조치는 주위에 존재하는 아이디어에 의존한다.”

<덧붙임>

○ BIEN 창립 전후에 유럽에서 일어났던 기본소득 논의는 자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BIEN과 BIKN이 제공하고 있는 ‘기본소득의 역사’를 주로 참고하였습니다.

○ 『21세기 기본소득』은 ‘흐름출판’에서 홍기빈의 번역으로 출판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 책은 입문용으로는 적당해 보이지 않습니다. 일단 분량이 상당히 많습니다. 게다가 사전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들어서 진도 나가기가 결코 수월하지 않습니다.

○ 혹시 기본소득에 입문하고 싶은 분들이 계시다면, 오준호가 쓰고 ‘개마고원’에서 펴낸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편하게 읽어내실 수 있습니다. 몇 명의 지인들이 『21세기 기본소득』을 여전히 완독하지 못했다고 알려왔습니다. 혹시라도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를 읽으신 후 다른 책을 원하시면, 언제든 댓글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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