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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을 생각하다 ⑥[기획 연재] 고영주 /(전) 거제지역자활센터 실장

2. 인간사회의 불평등

3) 불평등체제의 전개 ② : ‘팔려 가는 인간’ vs ‘버려지는 인간’

“역사적으로 볼 때, 한 집단의 경제적 풍요는 다른 집단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 『빈곤의 역사, 복지의 역사』, 허구생(2002)

“극도의 부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부를 자주 저임금과 위험한 상황에서 일하는 전 세계 사람들이라는 배경을 통해 재산을 축적했다.” - ‘Global Inequality(2020)’

이 두 개의 문장은 읽는 사람들에 따라 그 느낌이 다양할 것 같습니다만, 저에게는 무미건조하거나 지나치게 담담하다는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위 두 문장의 차이점은 시대적 배경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허구생의 문장은 빈곤의 문제를 15세기 말부터 시작되어 산업혁명 시기까지 이어진 ‘울타리치기 운동(enclosure movement)’과 영국의 ‘빈민법(貧民法, Poor Law)’을 들여다보고 연구한 결과에서 나왔고, 아래 문장은 2020년의 글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두 문장의 공통점은 시대를 초월하여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것의 핵심 용어는 바로 ‘울타리치기 운동(enclosure movement)’입니다.(이 부분은 ‘기본소득 주장의 배경’에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분제 사회가 들어서고 난 다음, ‘폭력적인 차지하기’의 가장 전형적이고도 잘 알려진 예는 ‘울타리치기 운동(enclosure movement)’입니다. 울타리치기 운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 기준에서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본주의의 등장 원인을 한두 가지만으로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만, 현대 자본주의의 맹아인 농업 자본주의(agrarian capitalism)가 ‘울타리치기 운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입니다. 또 비슷한 시기에 절대왕정의 등장과 함께 한 중상주의 정책, 식민지 침탈, 국외 무역 등은 ‘상업 자본주의’로 불립니다. 이 상업 자본주의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인간 사냥’과 ‘인간 매매’에 의존하였고, 팔려간 인간은 강제노동, 비참과 공포를 후손들에게까지 상속하였습니다. 흔히 상업 자본주의와 농업 자본주의로부터 시작된 ‘자본의 본원적 축적’ 또는 ‘자본의 원시 축적’이라고 부르는 사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한 축이 울타리치기인 것이지요. 이것은 ‘넷째’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둘째, ‘임금 노동의 종말’이 조심스럽게 예측되고 있는 이때, ‘임금 노동자의 탄생’이 이루어진 배경 하나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윤 추구에 열중하였던 ‘새로운 지주 집단’의 출현이 임금 노동자를 만들어내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중세 영주들과 지주, 토지관리인으로부터 지대를 뜯기며 살았던 소작인‧농노‧소농들이 부랑인(浮浪人)이 되어 떠돌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이 바로 ‘울타리치기’였던 것입니다. 이들 부랑인의 상당수는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일용직 노동자’였고 ‘비자발적 실업자’였습니다.

셋째, ‘기본소득의 역사’에서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인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와 후안 루이스 비베스(Juan Luis Vives, 1492-1540)가 등장하는 배경으로서의 울타리치기입니다. 모어가 『유토피아(Utopia)』에서 라파엘의 입을 빌려 말한 “당신들은 도둑들을 만들어내고선 도둑질을 했다는 이유로 처벌하고 있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빈민법의 이중성’을 파악하는 핵심 중의 하나이고, “만약 도둑질이 양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그 어떤 형벌로도 도둑질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 가혹한 처벌 대신 모든 사람들에게 생계를 꾸릴 수단을 제공해서, ‧‧‧‧‧ 끔찍한 궁핍에 빠지는 사람들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는 기본소득 사상의 근원과 맞닿아 있습니다. 또 비베스는 「빈민 원조에 대하여」에서 “궁핍해지기 전에 선물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과 ‘최소 소득 보장’을 내세움으로써 기본소득의 진정한 아버지라 불리기도 합니다.

넷째, ‘팔려 가는 인간’과 ‘버려지는 인간’이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점입니다. 노예로 불렸던 인간들이 ‘노동력을 가진 도구’로써 거래되었던 것은 고대 노예제시대부터 이미 시작된 일이었고, 9세기부터는 아라비아반도의 이슬람교도들이 아프리카 동부 잔지바르(Zanzibar) 등을 점령해 1천년 동안 아프리카인들을 이슬람의 노예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본격적으로 인간을 상품으로 팔아 수익을 얻는 ‘노예무역’을 시작한 국가는 1502년의 포르투갈입니다. 영국이 ‘노예 무역’을 장악하게 된 것은 1640년 교황이 노예무역을 금지하면서 카톨릭국가였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노예무역에서 손을 떼고 난 다음부터였습니다. 영국에서는 ‘버려지는 인간’의 역사가 먼저 시작되었고, 그것은 울타리치기 운동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울타리치기 운동(enclosure movement)’부터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울타리치기 운동은 보통 1차와 2차로 나누지만, 1차, 2차, 3차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1차 울타리치기 운동은 15세기 말에서 17세기 중반까지 주로 지주들이 곡물 생산보다 양모생산을 위해 경지를 확보하고 농지를 목장으로 전환시킨 운동입니다. 농경지는 물론 황무지, 공동경작지, 공유지까지 울타리가 둘러쳐졌습니다. 이는 중세의 경제생활이 화폐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과 연관되며, 특히 유럽대륙의 중세해체라는 변화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이었던 영국에 더 중요했다고 합니다. 이미 13세기부터 현금 압박을 받아온 토지 귀족들이 자신들의 땅을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봉토(封土, fief)로서가 아니라 현금 수입을 더 끌어낼 수 있는 원천으로 보기 시작하였던 것이고, 지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이지요.

제2차 울타리치기 운동은 농업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18세기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합법적인 의회입법을 통해 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이유로 제2차 울타리치기 운동을 의회 엔클로저(parliamentary enclosure)라고도 합니다. 이것이 울타리치기 운동의 마지막 단계로서 지조(地條, strip, 중세 유럽에서 장원의 경작지를 분할하는 최소 기본 단위. 보통 1에이커(약 1224평) 규모인데, 영주의 직영지로서 농노들이 경작하거나 개방 경지로서 자유민들이 경작하였습니다.)와 작은 땅뙈기들을 강제로 통합하여 상업적 경작에 적합하도록 직사각형 모양의 땅으로 전환시켰던 사건을 말합니다.

그런데 울타리치기는 그 땅을 경작하던 농민들과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잉글랜드에서 절대왕정을 추구했던 튜더 왕조(Tudor dynasty, 1485-1603) 초기부터 매우 고압적인 방식으로 공유지를 양떼 목초지로 전환시켰는데, 강제와 폭력이 함께 동원된 것이었습니다. 약간의 땅뙈기를 갖고 있던 농민들은 협박에 못이겨 땅을 포기하거나 사기를 당했고, 적절한 집값을 지불할 사람을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에 몇 푼 안되는 세간살이마저 헐값에 넘겨야 했습니다.

로버트 L. 하일브로너(Robert L. Heilbroner)에 따르면 최초의 울타리치기가 절정에 달했던 15세기와 16세기에 어떤 장원에서는 무려 4분의 3에서 10분의 9에 달하는 소작인들이 농장에서 쫓겨나야 했고, 아예 동네 전체가 깨끗이 사라지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존의 터전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부랑인이 되거나, 거지 또는 도시빈민으로 전락하였습니다. 1540년 6만명에 불과했던 런던 인구가 1640년에 30만명, 1750년엔 70만명으로 불어났던 원인이었습니다. 울타리치기는 농민의 실업과 이농, 농가의 황폐, 빈곤의 증대를 가져왔던 것이지요.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의 『유토피아(Utopia)』 제1권 고문관들의 대화에는 너무나 유명한 글, ‘양이 농민을 잡아먹는다!’가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양은 한때 그토록 온순하고 말 잘 듣고 또 먹는 것도 적은 동물이었지만, 이제는 아주 지독한 폭식에다가 지독하게 거친 동물이 되어 사람들까지 통째로 집어삼키는 놈이 되었다는 소문입니다. 양들이 아예 들판 전체와 집들과 도시까지 파괴하고 무너뜨려 모두 집어삼킨다는 겁니다. 왕국 전체에서 가장 곱고 비싼 양털이 나오는 지역들을 보세요. 이런 곳은 모조리 경작지가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이런 곳의 귀족들, 향신들뿐만이 아니에요. 심지어 경건한 하느님의 사람인 일부 수도원장들까지 모두 나서서 그들 땅의 조상들과 전임자들이 벌어들이던 연간 수입과 이윤에 만족하지 못해서 그 땅을 모조리 양의 방목지로 울타리를 쳐버리고, 집들을 부수고, 도시를 아예 뿌리째 뽑아 쑥밭으로 만들어버린 거죠. 딱 교회 건물만 남겨 놓았는데, 그나마 ‧‧‧‧‧‧ 양 우리로 쓰기 위해 남긴 거랍니다.

여기에서 기본소득 옹호론자들이 말하는 공유지, 그리고 ‘공유지의 사유화’와 관련한 내용을 덧붙여야 합니다. 근대 초까지 토지는 절대적 ‘소유(owning)’의 개념이 적용된 것이 아니라 ‘보유(holding)’의 개념만이 존재했습니다. 또 ‘사용권 보유인(copyholder)’은 대부분 농민들로서 토지 사용에 대한 권리를 문서화 된 계약이나 관습에 의해 보장받았습니다. 예컨대, 1217년의 ‘대헌장(Magna Carta)’과 짝을 이루는 ‘삼림헌장(Charter of the Forest)’은 평민 남성(the common man)의 생존권, 그리고 에스토바르(estovar)라고 불리는 공유지 내의 생존 수단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3세기에는 모든 교회가 한 해에 네 번 회중에게 ‘삼림헌장’을 낭독해주어야 했지요. 여기에다 모든 과부는 음식, 땔감, 주거 재료 등을 공유지에서 가져올 수 있는 권리를 가졌습니다. 이것은 관습적인 공공소유권이 정식으로 인정된 것을 뜻합니다.

원래 울타리치기가 진행되기 전까지는 들이나 숲 등의 공유지에서 소나 돼지를 방목하거나, 난방에 쓸 땔감을 수집하고, 건축 자재나 농기구 및 도구로 쓸 목재를 채취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흉작시에는 도토리 등과 같은 야생식물을 채집하여 생계를 꾸리는 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울타리치기 운동은 평민들 또는 농민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권이 걸려있던 공유지를 사유화했고, 그들을 생존의 터전에서 몰아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 의해 버려진 것입니다.

한편, 울타리치기로 이득을 본 사람들은 요먼(yeoman)이라 불리는 독립자영농(중농) 가운데서도 비교적 부유한 자들과 젠트리(gentry, 鄕紳)라 불리는 소지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봉건귀족처럼 신분관계나 농경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들의 토지를 과감히 개조하여 목장으로 만들었고, 새로운 유력자로 성장하여 나중에는 의회에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렇게 형성된 농업자본가들 중 상당수는 상인들과 함께 ‘제조업’이라는 전망 좋은 사업 영역으로 진출하였고, 상업 자본가 그리고 대부 자본가와 함께 산업 자본가라는 자본가의 한 축을 형성하였습니다.

이러한 울타리치기 과정은 봉건적 유대를 해체하고 절대왕정과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체제의 형성에 강력한 동력을 제공하였습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소득 원천을 완전히 빼앗긴 상태에서 농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지 또는 부랑자가 되거나, 적극적 대응으로 봉기를 일으키거나 아니면 대도시 빈민굴로 이주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전쟁을 제외하면 이토록 많은 사람이 먹을거리와 일거리를 찾아 길거리를 헤맨 것은 거의 처음입니다. 결과적으로 영국의 중상주의 및 산업혁명 시기와 맞물린 울타리치기 운동은 농민(소작인, 농노, 소농 등)의 빈민화와 임금노동자화를 전방위적으로 촉진시켰습니다.

울타리치기 운동에서 관찰되는 특징은 첫째, 폭력을 동원한 ‘내쫓기’와 ‘차지하기’, 둘째는 ‘공유지’의 ‘사유화’, 셋째는 변화된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득을 취하는 권력집단의 부상, 넷째는 사후대책으로서의 빈민정책으로 요약됩니다. 권력집단의 일방적인 ‘내쫓기’와 ‘공유지의 사유화’는 농민들의 기본적인 생계수단과 권리를 완전히 말소시켰고, 빈민구제의 요체인 빈민법은 ‘노동력 확보’와 ‘봉기’에 대처하는 통제 수단에 불과하였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특징들은 현대 자본주의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이렇듯 ‘버려지는 인간’과 ‘팔려가는 인간’을 통해서, 즉 인간을 버리고 팔면서 탄생한 것입니다. “누가 잉여를 가져가는가?”에 대한 토마스 모어의 대답은 ‘이 사회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게으러고 안락한 생활마저도 만족하지 않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이겠으나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주와 토지관리인은 소작인‧농노‧소농으로부터 지대를 뜯어낸 중세 영주들과 함께 ‧‧‧‧‧‧ 그들은 언제나 사회하층민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기생충’이었다. 그들 가운데 ‘고된 노동’을 통해 현재의 위치에 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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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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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노국 2021-01-22 12:02:29

    황폐화 되어가는 팬데믹 사회에 기본소득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기위해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비록 빈부의 격차가 더욱 커지는 암울한 현실이긴 하나 그래도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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