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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은 가능한가 ㉜ 完[기획 연재] 고영주 /(전) 거제지역자활센터 실장

3) 기본소득 기획연재를 마무리하며

“때가 도달한 아이디어보다 강력한 것은 없다.” -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1885)

기본소득이 갖는 함의는 여러 가지가 있을 터이고, 기본소득을 바라보는 시선도 각양각색입니다. 일부 좌파들은 기본소득을 ‘노동해방에 이르는 길’이라 보기도 하고, 중간적 입장에서는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 제공해주는 수단으로 인식하기도 하며, 우파들은 자본주의를 유지•발전시키는 하나의 모델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같은 처지 또는 상황에 있으면서도 목표가 저마다 다른 ‘동상이몽’인 셈입니다. 이 모든 것을 떠나서 기본소득 논의와 제도화 움직임이 갖는 핵심 가운데 하나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말처럼 때가 도달한 아이디어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 역외 계급 그리고 버려졌던 인간들과 버려질 사람들

그러나 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안이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상황이 간단치 않습니다. 도미노가 무너지듯 차례대로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될 위험도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독일의 개신교(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마르틴 니묄러(Friedrich Gustav Emil Martin Niemöller, 1892-1984)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유명한 시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를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나치’를 ‘자본주의가 몰고 온 제2의 기계시대’라고 읽으면서 말이지요.

그들(나치)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 이어서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 이어서... 그들이 내게 왔을 때... /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 줄 이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는 개신교 목사답게 반공주의자였고, 그래서 그는 처음에 히틀러의 등장을 지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나치의 인종주의에 반대했고, 나치에 동조한 독일의 개신교를 비판했으며, 평화주의자이자 반전주의자로 활동했다고 하지요. 그는 또 1937년부터 1945년까지 다하우 강제 수용소(Konzentrationslager Dachau)에 갇혀 있기도 하였습니다.

니묄러의 시를 보면 흡사 인간 도미노 게임 같습니다. 개인들은 도미노 게임판의 세워진 나무 패 같습니다. 가해지는 충격에 속절없이 쓰러지죠. 다행인 것은 우리가 도미노 게임의 나무 패와는 달리 연대할 수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시작을 알렸던 ‘울타리 치기 운동(인클로저 운동)’이 벌어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버려졌는지 알고 있습니다. 버려진 사람들은 부랑인(vagabond)이 되어 전국을 떠돌았습니다. 또한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후 그리고 우리나라에 산업화가 시작된 이후에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 몰인격적 대우라는 착취에 시달렸는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증기기관이 제1의 기계시대를 열었다면, 인공지능 AI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술은 제2의 기계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제2의 기계시대에 내재되어 있는 잔인함과 난폭함은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관심 기울이지 못하는 사이, 제2의 기계시대가 버리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미 곳곳의 수용소에 갇혀 있고, 수용소의 이름도 이미 지어졌습니다.

그 수용소들의 이름은 ‘역외 계급’, ‘루틴 노동자 계급’ 또는 ‘프레카리아트’ 등으로 지칭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의 국면이 니묄러의 시,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의 상황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비유하자면 니묄러의 시에서 처음으로 잡혀간 공산주의자들이 현대판 수용소에서 부여받은 지위는 ‘역외 계급(Underclass)’입니다. 역외 계급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군나르 뮈르달(Gunnar Myrdal, 1898-1987)이 1963년에 탈산업사회의 위험을 알리기 위해 처음 사용했던 말입니다.

뮈르달이 보기에 탈산업화된 사회에서는 일자리를 원하는 모든 사람을 고용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영구적 실업’의 상태로 내몹니다. 사회적으로 쓸모없어진 상태의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고, 뮈르달의 견해에 따르면 역외 계급의 구성원들은 사회적 배제의 희생자들입니다. 사회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못하고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남아도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잉여 인간’인 셈이지요.

그런데 배제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전혀 통제할 수도 영향을 미칠수도 없는 ‘경제 논리의 산물’이었고, ‘역외 계급’이라는 신분은 그들 스스로 선택한 결과물이 아니었습니다. 인도의 불가촉 천민인 ‘달리트’(Dalit)는 ‘억압받는 자’, ‘파괴된 자’, ‘억눌린 자’ 등을 뜻하고, 이들에게는 주로 시체 처리, 길거리 청소, 분뇨 처리, 가죽 수리, 길거리 청소, 말단 요리사로 음식 찌꺼기 처리, 농장 머슴 등의 역할이 주어졌다면, 역외 계급은 사실상 달리트보다 못한 존재일 수 있습니다.

뮈르달의 언급 이후, 미국에서 ‘역외 계급’이 다시 거론된 것은 1977년 ‘타임(Time)’지에서였습니다. 타임지는 뮈르달과는 다른 의미로 이 개념을 사용했는데, “거의 모든 사람이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다루기 힘들고, 사회적으로 이질적이며, 적의를 품은 인간들의 대집단.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사람들. 바로 이들이 미국의 역외 계급이다.”라고 정의하지요.

이 역외 계급의 긴 목록에는 소년범, 학교 중퇴자, 약물 중독자, 복지급여를 받는 아이 엄마, 강도, 방화범, 미혼모, 포주, 마약 밀매자, 노숙자, 거지 등이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아직 떠밀려나지 않은 보통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모르게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거나 공공연히 두려움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무능력’, ‘나태’, ‘행동상의 결함’, ‘심리적 문제’ 등의 낙인을 찍고, 사회적 경계 바깥으로 내몰린 게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빈곤을 선택했다고 규정지으면서, ‘사회의 오작동’을 철저히 은폐합니다. 원인과 결과를 바꾸어 놓으면서 말이지요.

두 번째로 잡혀간 노동조합원은 ‘루틴 노동자(Routine Labourers)’입니다. ‘루틴 노동자’라는 용어는 경제학자이자 빌 클린턴의 대통령 재임시 노동부 장관을 지냈던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가 처음 사용했습니다.

루틴 노동자는 전통적인 조립라인이나 ‘새롭고 개량된’ 형태의 조립라인인 자동화 전자장치들(이를테면 슈퍼마켓 계산대) 앞에서 틀에 박힌 일을 반복하는 노동자들을 말합니다. 고용주의 입장에서 루틴 노동자는 필요할 때 고용했다가 언제든 해고할 수 있고, 언제든 쓰고 버릴 수 있으며, 쉽게 대체할 수 있는 노동자인 거지요.

말하자면 비정규직 노동자를 포함하는 ‘프레카리아트(Precariat)’, 즉 ‘불안정 노동자’ 또는 ‘불안정 무산자’에 속한 그룹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셀프 계산대나 허드렛일을 하는 로봇에게 밀려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긱 노동(gig work)’, 즉 ‘부스러기 노동’으로 생존해가는 사람들이 갇힌 수용소는 어디일까요? 흔히 ‘워킹 푸어(Working Poor, 근로 빈곤층)’라 불리는 사람들이 갇힌 수용소는 바버라 에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의 워킹 푸어 생존기인 『노동의 배신』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죽어라 일하고 무시당하면서 “감정, 생각, 존엄성마저 빈곤해”지는 곳’입니다.

세 번째로 잡혀갔던 ‘유대인’은 어떤 그룹을 대응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마지막 그룹이긴 할까요? 중요한 것은 몇 번째 그룹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아닐 터입니다. 가장 먼저 잡혀간 ‘역외 계급’과 두 번째로 잡혀간 ‘프레카리아트’를 배제와 불평등, 빈곤을 생산해내는 추동력으로부터 구출해내지 않으면, 그다음 차례는 우리가 될 테니까요.

○ 사회의 재설계와 원초적 채무

나치 독일처럼 사회의 구성원들이 한 그룹씩 잡혀가서 수용소에 갇힐 것인가, 아니면 연대해서 살만한 사회를 만들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그 선택에는 어느 정도의 두려움이 동반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조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마음 자세와 행위들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심각하게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입니다.

나치 부역자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해야 할 일’을 했던 것처럼, 세상을 바꾸고 있는 디지털 기술자들은 사람과 사회에 대한 고려 없이 그 일들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자본가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사회의 부를 뽑아 먹어왔던 것처럼, 어쩌면 ‘무어의 법칙’을 넘어서는 기술의 발전을 가속화시키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엔지니어들은 발명할 뿐이죠. 그들은 자신들의 발명품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해 극비로 추진했던 맨해튼 프로젝트를 보세요. 그들은 일단 기술을 개발하고 봅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렇게 말하죠, ‘우리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 『노동의 미래와 기본소득』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행위의 결과를 예측하고 사회에 미칠 파장을 고려해가며 움직였던 전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무서운 사실입니다. 엔지니어들은 그저 ‘제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인 거지요. 돌이키려고 하거나, 속도를 줄이거나 하는 일들은 불가능할뿐더러 ‘러다이트(Luddite, 기계파괴)’를 소환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추세가 그 어느 때보다 극소수의 승자와 엘리트만을 위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회의 재설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회의 재설계에 필요한 사회적 방법 가운데 하나가 기본소득입니다. 제가 ‘기본소득은 무엇인가 ⑭’에서 소개했던 ‘기저(바닥) 제약으로 평균 최대화(Maximizing The Average With a Floor Constraint)’를 먼저 실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기본적인 소득 수준이 ‘누구도 가난 때문에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상태’나 실패했을 경우에도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가 되도록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역외 계급’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회 바깥으로 튕겨 나가지 않도록 밑바닥을 다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공교롭게도 앤디 스턴의 책 『노동의 미래와 기본소득』의 원제도 ‘Raising the Floor’, 즉 ‘바닥 들어 올리기’였네요.

그러나 기본소득 지급만으로는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습니다. 기본소득은 결코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습니다. 기본소득은 바닥을 들어 올리는 수단이자 바탕을 공고하게 다지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너무도 쉽게 망각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명제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므로 태어나면서부터 ‘원초적 채무(primordial debt)’를 지게 됩니다. 사회의 모든 개인들이 공동체에 지고 있는 채무를 원초적 채무라고 합니다. 생존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회의 지속성과 연속성 덕분에 자신들 개개인의 존속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토머스 페인은 이미 오래전에 “개인 재산은 사회의 결과물이므로 한 개인이 사회의 도움 없이 개인 재산을 획득하기란 토지를 송두리째 만들어내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갈파했던 것입니다.

전통적인 제조업 기반의 기업이든 IT기업이든 금융기업이든 사회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들의 이윤도, 그들의 부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들의 이윤과 축적한 부는 사회 속에서 사회의 구성원들을 통해 획득된 것이고, 1%인 그들만 남는 순간 그들의 부는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이 가진 사람들은 그에 비례해서 높은 세금을 납부해야 합니다. 자선이나 노블레스 오블리주 등의 차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생토록 원초적 채무를 사회에 갚아나가야 하는 일이 제도화되고,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들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를 통한 정치 권력입니다. 이것을 다시 실천하려는 국가가 있습니다. 미국입니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을 줄이기 위해 법인세를 인상한 데 이어, 자본이득세 역시 2배나 인상한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과거에 소득세 최고 연방세율이 80% 이상, 상속세 최고 한계세율이 70% 이상이었던 수준으로 되돌아갈지는 알 수 없으나 ‘부자 증세’ 모드로 접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에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들조차 코로나 극복과 양극화 완화를 위한 재원 마련 방안으로 고소득자와 대기업에 대한 누진세 강화를 거듭 권고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자유주의의 ‘앞잡이(Agent)’였던 IMF마저 기류가 바뀐 것은 주목할만한 일임에 분명합니다.

○ 때가 도달한 아이디어 : ‘소득과 노동의 연계를 끊는 새로운 원칙’

어떤 직업도 더 이상 장기적인 쓸모를 확신할 수 없는 사회, 거대한 생산 능력과 소비자 구매력 간의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는 로버트 테오발드의 말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소득과 노동의 연계를 끊는 새로운 원칙’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동화가 계속해서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노동력 대체를 가져오기 때문에 소득과 노동간의 전통적인 관계를 파괴할 필요가 있다. 기계가 더욱 더 많은 노동력을 대체함에 따라서 사람들은 공식 경제에서의 취업과는 별도로 소득을 보장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야 사람들의 생존이 보장되고 경제는 생산된 서비스의 소비에 필요한 구매력을 갖게 된다.”

사실을 말하자면, 경제학자들의 말들은 따뜻하지 않습니다. 경제학자인 테오발드의 활자화된 언명 역시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따뜻한 경제학자들도 제법 많고, 그들이 주장하는 기본소득 또는 보장 소득은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 온기가 있습니다.

물질적 조건으로 볼 때, 기원전 3000년 무렵부터 500년 무렵까지 존속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제국들이 관개 치수 능력에 바탕을 두고 농업을 조직함으로써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생계 경제’에서 해방된 경제적 풍요를 이루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풍요가 이 시대에 존재하니까요.

불평등을 완전히 해소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지만, 모두가 든든한 발판을 딛고 설 수 있는 사회, 불평등으로 인한 숱한 사회적 질병들이 치유되고 통제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가능한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임>

○ 저는 기본소득에 대한 논쟁에서 ‘노동 조건의 유무(무조건성에 대한 논란)’는 퇴출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분명히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꿈꾸어야 하는 사회는 노동이 사라진 사회가 아니라 적정 시간 노동하고, 누구나 일하려 할 때 일자리에 접근 가능하며, 일꾼 본능이 자유롭게 발현되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생태주의적 관점에서의 기본소득은 다루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환경단체 등의 전문가들이 다루어주길 기대합니다.

○ 길었던 연재가 모두 끝났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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