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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을 생각하다 ④[기획 연재] 고영주 /전 거제지역자활센터 실장

<보충 1>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 글은 미흡하기 짝이 없는 제 글(기본소득을 생각하다② 인간은 불평등을 좋아하나?)을 읽게 된 지인 몇 분과 나눈 대화를 토대로 한 ‘변명’ 또는 ‘변론’입니다. 어떤 분은 “선사시대가 평등주의 사회였다고 합의되었다는 말이 사실이냐?”고 반문하기도 했고, 어떤 분은 “인간의 잔인성과 폭력성은 왜 말하지 않는 거냐?”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고고학자나 인류학자들이 외계인(?)과 같은 외부의 관찰자가 아니기에 그들의 연구는 일정한 편향을 띨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예컨대 완전한 객관성을 담보하는 것처럼 보이는 물리학조차도 그 지식을 이용하거나 수용하는 데는 사회의 지배적인 흐름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찰스 다윈의 진화론조차도 그 시대의 지배적 사상과 개인적 소망의 범위, 지식의 한계를 완벽히 뛰어넘지는 못했다는 사실에 비춰봐도 그러합니다. 또한 과학적 사실조차도 수용자에 따라서 정치색을 띠게 되기도 합니다.

현생 인류까지 포함한 호모속(屬)은 수렵채집의 시기가 99.5%에 이르고 현재 인간 본성과 행위의 대부분은 그 시기에 형성되었음이 분명하므로 선사시대 인간의 모습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는 고고학이나 인류학에서 중요해 보입니다. 과거를 살펴보는 것은 현재와 미래를 관찰하고 예측하는 데에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니까요. 따라서 연구자들의 태도, 즉 ‘어떤 사회를 소망하는가’와 그 연구자가 ‘현재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가’는 중요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연구자들의 입장도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와 ‘장 자크 루소’를 양 극단으로 하는 어디엔가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홉스는 흔히 인간사회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보며, 루소의 사회계약을 맺기 전의 자연상태는 개인적이고 평화로운 ‘목가적인 풍경’을 연상시킵니다.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하는 내용은 이들이 고고학이나 인류학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얘기하는 역사시대 이전의 상태는 추측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지요. 특히 아무리 루소의 사상에 호감도가 높은 사람일지라도 루소의 자연 상태는 ‘가상의 실재’라는 걸 인정합니다.

가장 최근의 연구 결과는 세계 최고의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고 부산대학교 IBS(기초과학연구원) 기후물리 연구단 단장인 고기후학자 악셀 팀머만(Axel Timmermann)이 2019년부터 2020년까지 연구하고 발표한 논문(동아사이언스, 「네안데르탈인 멸종 사건, 범인은 호모 사피엔스」 2020.06.01. 참고)에 따르면 현생 인류의 정체성과 역사에 대한 우울함마저 느끼게 합니다. 팀머만은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인류가 확산하는 시기에 사라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며 “이번 시뮬레이션 연구로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이 우리가 행한 최초의 주요 멸종 사건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짐작컨대 콜럼버스 이후로 유럽인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만났을 때 행했던 매우 비호의적인 방식과 유사한 상호작용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입니다. 네안데르탈인에게는 면력력이 없는 병원균의 전파, 호모 사피엔스의 DNA에 2%를 차지하고 있는 네안데르탈인의 흔적과 사피엔스의 거주지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의 뼈(사피엔스에게 잡아 먹혔을 것으로 짐작)로 유추되는 집단적 폭력 등으로 멸종을 야기했으리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의도하지 않았겠으나 인간의 행위가 지구 전체의 생물종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위협적인 존재임에 틀림없다는 점이고, 오죽했으면 ‘인류세(人類世)’라는 새로운 기준이 학명을 얻기 직전까지 이르렀겠습니까.

어쨌거나 인간과 인간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너무나 다릅니다. 하지만 ‘티투스 마키우스 플라우투스(Titus Maccius Plautus, 기원전 254년~기원전 184년)’가 희극에서 했다는 대사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를 변용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진화적 자연 상태’를 홉스의 견해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은 성찰의 밑바탕 하나로 삼을 수는 있을지언정 그 이상은 아닌 듯합니다. 『문명과 전쟁』을 저술한 아자 가트(Azar Gat)가 대체로 홉스주의자에 속합니다. 남은 것은 이제부터 ‘무엇을 하느냐’인데, 미래를 어둡지 않게 하려는 노력은 루소주의자들의 인식이 더 설득력있게 들리기도 합니다. 우울하지만, 바꾸어낼 수 있다는 희망도 함께 주니까요. 우리가 아무리 객관적이려고 노력하더라도 인간사회에 속해있는 내부자의 위치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불평등과 기본소득을 함께 고민해보려는 저의 시도가 다른 지점에서 더 근본적인 질문인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부딪혔습니다. 제가 그런 거대한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므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개념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소스타인 베블런은 그러한 질문과 불평등을 이해하는데 실마리 하나를 던져줍니다.

베블런의 개념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장인 본능(Instinct of Workmanship)’과 ‘약탈자 본능(Predatory Instinct)’입니다. 베블런은 이를 ‘본능적 편향’이라 하였는데, 인간의 ‘모든 본능적 행동은 지능적이며 목적론적’이라는 서술에서 보듯, 두 가지 본능은 동물적인 본능을 뜻한다기보다는, 사회제도와 문화에 의한 ‘사고 습관’이나 ‘행동 양식’을 내포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약탈자 본능은 인간 갈등, 정복을 통한 복속, 성적‧인종적‧계급적 착취, 사적 소유 등과 연관되며, 장인 본능은 자기실현이라는 즐거움의 느낌, 협동, 개인의 평등과 독립, 논리적이고 사회적인 상호관계, 평화적인 성향 등과 연관됩니다.

약탈자 본능과 일꾼 본능에 대한 E. K. 헌트(Emery Kay Hunt)의 해석인 ‘인간 행위의 근저에 있는 모든 특징은 거의 모든 사회에서 일정한 형태로 존재하는 근본적이며 상반되는 두 개의 이분법과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인간 행위에 나타나는 모든 특징은 두 개의 덩어리로 분류할 수 있으며, 그 사이에는 영원한 갈등이 존재한다’를 홍기빈의 해석과 같이 “두 본능(‘불한당 본능’과 ‘일꾼 본능’)을 양 끝에 두고 이를 연결하는 연속선 하나가 그어져 있다고 가정”하면 개인이나 집단은 이 연속선 위의 어느 한 지점에 위치하거나 이동해가는 존재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개인과 집단은 약탈자 본능과 장인 본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상황과 성향, 연속선 위의 위치에 따라 행동 양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상식적인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쉽고 거칠게 말하자면, 선함과 악함의 어디쯤에 있는 존재라는 거지요.

인간 세계의 불평등의 원인 가운데 하나를 얘기한 것도 소개하고 싶습니다. 베블런의 관점에서는 자본주의와 신분제 사회의 경우, 두 가지 본능 가운데 약탈자 본능이 항상 승리하고 일꾼 본능을 지배한 역사였습니다. “이런 사회에서의 노동은 항상 지긋지긋한 일이 되며, 노동행위는 열등한 힘의 관습적인 증거로 이해되었고, 그 때문에 노동 자체도 더 이상 따져볼 것도 없이 본질적으로 비천한 일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장인(일꾼) 본능은 주요 관심 대상이 되고자 하는 다른 기본적 본능 성향들과의 경쟁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쉽게 자리를 내주고, 억압을 견디며 정지된 채 있다가, 다른 긴급한 관심의 압력이 완화될 때 다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베블런의 얘기는 조금 어렵습니다만, 평등주의 체제를 지탱했던 ‘사회적 압력’이 해체된 상황을 고려하면 되새겨봄직한 내용입니다.

<참고>

1) 베블런은 장인 본능을 장인 센스(Sense of Workmanship)와 혼용하고, 홍기빈은 이를 ‘제작 본능’ 또는 ‘일꾼 본능’ 등으로 번역합니다.

2) 베블런은 ‘본능적 편향’을 ‘본능적 성향’의 하위 개념으로 봅니다.

3) 불한당 근성(Sporstmanship)과 유한계급(Leisure Class)은 약탈적 본능의 하위개념이거나 결과이며, ‘쓸데없는 호기심(idle curiosity)’은 장인 본능의 하위 개념이고, ‘부모 성향(parental vent)’은 장인 본능과 공존하면서 공동체의 안락한 삶, 미래의 공동체의 안녕과 관계되며 장인 본능과 상호 교류합니다.

4) 김승균은 『유한계급론』 294쪽에서 sportmanship을 ‘스포츠 정신’으로 번역하였으나, 홍기빈은 “불한당 근성이란 자기는 먹고 사는 데 필요한 일을 할 필요가 없으며 이를 과시하기 위해 사냥 및 놀이(sport)처럼 비생산적인 일이나 하면서 빈둥대고 싶은 본능과 관계가 있다. 불한당(不汗黨)이란 말 그대로 ‘땀을 안 흘리며 살아가는 족속들’이라는 뜻이다”라며 sportmanship을 불한당 근성으로 번역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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