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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포로수용소 여자포로와 돗대기 시장거제의 재발견 -거제포로수용소 여자포로수용동 &부산 국제시장의 원조 거제 ‘돗대기’ 시장

1951년 2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고현동 독봉산 아래 거제포로수용소엔 17만 여 명의 반공과 친공이라는 이름으로 분리된 포로들이 또 다른 이념대립의 역사를 만들어갔다.

현재 거제시는 거제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와 관련된 다양한 기록물을 바탕으로 세계유네스코기록유산 등재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남자포로가 대부분이었던 거제포로수용소엔 여자포로도 존재했다. 그리고 당시 보급품 밀반출로 만들어진 일명 ‘돗대기 시장’ 이야기는 현재 흔적만 더듬어 볼 수 있는 거제의 잊혀진 역사 중 하나다.

일반적인 포로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거제포로수용소 내 여자포로의 생활상과 부산 국제시장의 원조 격인 거제의 ‘돗대기’ 시장에 대한 이야기는 향토사학자인 이승철(거제박물관 명예관장) 씨가 1984년부터 당시 포로 및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녹취한 이야기들로 더듬어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가 잊어선 안 될 과거의 기록이자 우리 미래의 방향을 알려주는 소중한 유산이며, 이정표다.

거제포로수용소 여자포로수용동

포로수용소에 여자포로가 있었는데 대부분 처녀였고 그중에 60살 먹은 노인과 일반인 여자도 잡혀 있었다. 여자포로들은 대부분 남한 출신으로 북한 여성동맹에 가입해 활동했다는 명목으로 포로가 됐다.

포로 중엔 억울하게 포로로 몰린 민간인도 꽤 많았다고 한다. 유엔군이 우리나라 여자의 연령을 감별하는데 한계가 있고 말이 통하지 않아 피난 가던 사람들 중 장이나 행동이 수상하다고 판단되면 포로로 잡아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로가 아니라고 말하면 오히려 반공포로가 많았던 수용동에서 살아남기 힘든 탓에 포로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한 채 포로행세를 하며 살아 갈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여자포로수용소 인근에 있던 76수용소는 친공포로수용동과 가까워 정보원들이 근처에만 가도 돌을 던지고 욕을 하고 고무총까지 쏘는 통에 멀리서 정탐을 하는 등 제대로 된 조사가 힘들었다고 한다.

특히 북한출신 여자포로 가운데는 피난민들과 연관된 포로도 더러 있어 피난민이 철조망 사이로 또는 넘어 던져 보낸 민간인 옷을 입고 막사 밖에 일하러 나와선 갈아입고 피난민 행세를 하며 탈출을 시도한 포로도 있었다.

때문에 정보기관에선 여자포로수용동과 외부접촉을 감시했는데, 여자포로수용소에는 임신한 여자가 많았다.

하지만 한국군 경비나 정보원들이 여자포로수용동을 지나면 여자포로들이 침을 뱉거나 야유를 보내는 것은 물론 심한 욕을 내 뱉기 일쑤여서 제대로 된 정보활동이 어려웠다.

감시와 통제가 삼엄한 포로수용소에서 어떤 연유로 여자포로의 임신이 가능했는지 정보원들이 알아보려 애썼지만 결국엔 정확한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풍문으로는 도트준장이 납치사건이 있기 전까지 수용동 내부의 경계나 분리가 자유로운 편이어서 포로들이 막사를 옮겨 다니며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때문에 여자포로들이 남자포로나 피난민과 관계를 가졌다는 소문도 있고, 포로수용소에 수용되기 전 전쟁터에서 이미 임신을 한 상태에서 수용돼 아이를 출산 했다는 등 다양한 추측이 오갔다.

76수용소는 인공기를 달고 포로들이 인민군복을 만들어 입었다. 인민군복은 수용소 안 막사에 있는 재봉틀로 만들어졌는데 당시 재봉틀은 수용소 외부에서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는데 어떻게 내부까지 유입됐는지 알 수 없었다.

또 이들은 군사훈련을 하면서 막사가 떠나갈 듯 큰소리로 ‘인민군가’를 불렀고, 김일성 동상까지 만들어 세웠다.

피난민과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가까운 거리에서 뭔가를 주고받는 일이 많았고. 막사 안에선 자제적인 방송도 하고 라디오도 시청도 했다.

여자포로수용동에는 당시 300명이 넘는 여자포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들 대부분은 포로교환 때 북으로 넘어갔다.

여자포로수용동은 일반 포로수용동보다 감시가 훨씬 소홀했는데 여자포로 중엔 간호사와 교환원으로 근무한 포로가 많았다. 이들은 주로 보조간호사와 영어통역관 및 전화교환대에 근무 하면서 얻은 정보를 친공포로 간부에게 전달하는 일을 했다.

당시 여자포로들 중엔 대학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신문화 여성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대부분 남조선 여성동맹에 가입해 선전활동, 공작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포로수용소에 끌려온 사례가 많았다.

여자포로수용동은 수양동 주작골 가는 길(해명과 수월사이) 인근으로 이들은 빨래를 하고 옷을 말리는 일을 일과처럼 반복했다. 포로수용소의 막사 사이 지붕엔 연락책을 담당하는 사람이 한명 씩 있었고 비교적 자유로운 연락이 오갔다.

부산 국제시장의 원조 거제 ‘돗대기’ 시장

사곡 재 인근과 연초 임전다리, 그리고 문동 삼거리 재에 미군 헌병 검문소가 만들어 졌는데 이 인근에는 일명 ‘돗데기 시장’이 형성됐다. 사등면 두동 인근 도깨비 재에 있어서 ‘도깨비 시장’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돗대기 시장은 토트 준장의 이름을 따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거제의 돗대기 시장은 시간이 흐르면서 부산지역으로 까지 영역을 넓혔고 이후 부산의 돗대기 시장은 국제적인 물건이 많다는 의미로 ‘국제시장’으로 불리게 됐다.

돗대기 시장은 당시 거제포로수용소에서 나온 각종 통조림, 군대천막 의약품, 치약, 칫솔, 비누, 군복, 담요, 각종 그릇, 수저, 물병, 농사용품 등 군수품들을 파는 시장이었다.

군수품들이 반출된 경로는 포로들이 훔쳐 피난민들에게 팔거나 양공주들이 미군을 상대로 받은 물품이다. 피난민들은 주로 포로수용소 철조망 밖에서 포로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넣어주고 그 대가로 포로들이 사용하는 물품을 받아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돗대기 시장의 물건들은 현재 장평에 있었던 보급창(디큐브 백화점 맞은 편) 노동자들이 빼돌린 보급품이 가장 많았다.

포로수용소 및 피난민과 관련된 보급품을 실을 배가 현재 ‘삼성 게스트하우스’ 인근 부두로 왔다. 당시 고현항의 경우 수심이 얕아 배가 정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평 부두에서 하역된 보급품 들은 장평 보급창고에 보관 됐다. 보급창고에 쌓인 물건은 이름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다양했다.

당시 보급창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물품을 빼돌리는 일이 많았다. 보급창에서 빼낸 물건들은 한국군이 군대 물품을 수령하러 오는 틈을 타 트럭 째 빼돌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보급창 노동자들이 하루에 50~100명이나 해고당하는 일이 다반사 였다.

처음 생활용품만 빼돌리던 근무자들은 급기야 무기까지 훔쳐내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보급품 창고 근무자들은 매달 40달러 정도 월급을 받았는데 그 정면 논 두마지기를 살 수 있는 가치임에도 보급품을 빼돌려 파는 일은 큰 이윤이 되는 일이었다.

감시가 엄격한 때엔 보급품 창고에 보초서는 미군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까지 보급품을 빼돌리는 일도 흔했던 시절이었다.

보급품을 빼돌리는 일을 했던 사람들은 주로 피난민들로 거제근처에서 군용품 장사를 하며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반면 거제에 포로수용소가 생기면서 만들어진 거제토박이 소개민 1116세대는 피난민 아닌 피난생활을 3년 넘도록 하면서 보급품을 빼돌려 파는 피난민들보다 더 못한 삶을 이어갔다.

도트준장 납치사건(1952년 5월 7일 수용소장 도트 준장이 제76수용소 출입구에서 포로 대표와 면담 중 포로들에게 납치돼 인질이 된 사건) 이후부터 피난민에게 지급된 보급품의 유출이 많아졌고, 감시도 비교적 소홀해 보급품이 민간인 지역으로 유출이 활발해졌다. 그래서 거제지역 안에서 못다 판 잉여 보급품들은 부산지역과 서울 남대문 시장까지 흘러갔다.

자료 = <6·25 전쟁과 그때 그 시절, 이승철>

도떼기 - 돗대기

'돗대기 시장'과 '도떼기 시장'에 대한 어원과 설은 사전적 해석 및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풀이된다.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도떼기 시장'의 사전적 접근방식은 ‘도’는 한자 ‘都’로, ‘모두’라는 뜻과 ‘떼다’의 명사형 ‘떼기’를 붙혀 도떼기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장사를 하려고 한꺼번에 많은 물건을 사다’라는 설도 있고, 일본의 영향을 받아 경매에서 낙찰받았을때 말하는 ‘돗따’의 파생어라는 설이다.

'도떼기 시장'이란 명칭이 처음으로 사용된 시장은 부산의 국제시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국제시장은 1945년 광복이후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해 1948년 ‘자유 시장’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국제시장이란 명칭은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진주하면서, 군용물자와 함께 온갖 상품들이 부산항을 통해 밀수입되었고 이들 밀수입 상품들은 이곳을 통해 전국 주요시장으로 공급되면서 불렸다는 것이다.

부산중구청은 국제시장 장터를 ‘돗대기 시장’ 혹은 ‘돗떼기 시장’이라고도 하는데 이렇게 불리게 된 이유를 ‘시장의 규모가 크고 외국물건 등 없는 게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있는 데로 싹 쓸어 모아 물건을 흥정하는 도거리 시장이거나, 도거리로 떼어 흥정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 고 기록하고 있다.

'도떼기 시장'보다 '돗데기 시장'으로 먼저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제시지 등엔 다른 어원 및 역사적 해설이 설명돼 있다. 한국전쟁 당시 운영․설치된 거제도포로수용소엔 1951년 3월 5일에는 유엔의 구호기관인 CAC 거제도팀이 신설됐다.

그리고 기사에서처럼 흥남철수작전으로 북한 피난민이 거제도에 거주하게 됐고 포로수용소에서 유출된 상품을 파는 무질서하게 난전이 형성됐다.

거제포로수용소 책임자였던 돗드 준장은 무질서한 난전을 관리하기 위해 일정한 구역을 정했는데 사람들은 이 거리를 ‘돗드 시장’ 이라 불렀고 나중엔 ‘돗대기’ 시장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돗대기 시장’ 또는 ‘도떼기 시장’은 파생설의 어원에서 차이는 있지만 역사적 배경은 한국전쟁 시기로 같다. 본 기사에선 거제도포로수용소와 관련된 내용과 관련해 ‘돗드시장’에서 파생된 ‘돗대기 시장’을 인용했다.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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