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희

코스모스
연분홍, 진홍의 꽃물결이 인다. 지는 꽃잎 애잔함에 발길이 머문다. 기다란 목을 늘어뜨리고 줄기며 꽃대는 메말라 간다. 쌀쌀해진 바람이 야속하려나. 따스한 햇살이 그리울 게다. 힘겨웠을까. 코스모스가 한 대의 삶을 접고 있다. 꽃잎 진자리에 가시 같은 씨가 맺혔다. 내일을 기약함이다. 바람결이 갈무리를 재촉하는가. 꽃씨가 날리고 흩어진다. 흙속의 잠자리에 드는 것이리라. 이제 부모 될 채비를 하려나보다. 봄이 오면 새싹으로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하겠지. 흔들리며 속삭인다. 시퍼런 가을하늘도 무심한 듯 시들어가는 꽃잎을 바라본다. 가을의 정취에 흠뻑 젖게 해준 꽃에게 감사를 드린다. 한 움큼 씨를 모아 잡초만 무성한 길가에 뿌려준다. 이듬해 가을 들녘은 온통 꽃 천지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호박덩이
아직 남은 볕의 온기가 마지막 꽃을 피운다. 처절한 주황이다. 호박꽃이라 인간들 흠을 잡지만 단아한 초롱꽃이 화사하다.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꽃이어 설까. 더욱 청아하다. 제 흥에 겨워 멋대로 어우러진 넝쿨은 또 어떤가. 뜨겁던 여름 주황의 꽃이며 손바닥 같은 잎을 무성히 키우던 줄기다. 길섶이나 밭 가랑이나 아무데고 편안히 누워 기지개를 폈다. 눈치 볼 것 없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던 넝쿨이다. 이제 물기 말라지고 색도 바랬다. 무서리 내릴 때까지 이렇듯 처연하게 들판을 지키리라. 여기저기 둥그런 덩이들이 널브러져 있다. 아니 저만치서 덩그마니 웃고 있다. 둥실둥실한 넉넉함을 망연히 쳐다본다.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않고 스스로 무르익고 여물은 덩이다. 이 빠진 할머니의 만개한 웃음 같은 몸으로 누런 옷도 입었다. 뽐내지 않아도 꽉차있는 의연함이다. 꾸미지 않은 푸근함이다. 부네 탈같이 정겹다. 짐승이나 인간의 먹이로 생을 마감하지만 겸허하다. 몇 덩이 그대로 썩어 거름되고 굳이 씨 뿌리지 않아도 다시 나서 대가족을 이룰 것이다. 많은 자손을 거느린 풍요롭고 자애로운 대지의 모성 같다. 저무는 가을 들녘의 덩실한 호박덩이가 되어도 좋지 싶다.

밤송이
억제할 수없는 욕망인가. 톡톡 벌어지며 알밤이 튕겨져 나온다. 반지르르 윤나는 젊음이 탱글탱글 알차다. 품은 자식 싸안으며 정성으로 길러냈다. 가시 세워 독기 품으며 억척으로 지켜냈다. 밤톨처럼 당차게 한 삶을 꾸려왔다. 이제 그만 떨어져 가라 힘껏 알밤을 밀쳐내고는 해산한 몸으로 땅바닥에 나자빠졌다. 시체처럼 뒹굴어도 빈 몸이니 홀가분하고 편하다. 서슬 퍼렇던 가시도 무뎌지고 가을볕에 말라 버석댄다. 할 일을 다 해선가. 밟히고 짓눌려도 몰라라 무심하다. 아니 서둘러 썩어져서 흙이 되려는가 보다.

빈 논
내 그림자 논두렁에 섰다. 푸름이 사라진 논바닥이 휑하다. 베어진 벼 포기에서 철모르고 불쑥불쑥 돋은 싹이 그나마 스산함을 덜어준다. 여기저기서 연기가 피워 오른다. 되잖게 다시 나려는 방자함을 나무라듯 농부는 곳곳에 불을 지른다. 때 아닌 성급함을 혹독하게 단속하려나보다. 교만을 버리고 기다리라 함인가. 거름되어 흙으로 돌아가라 이름이다. 제 몫을 다 해내고 엎드려 누운 들판이 평화롭고 대견하다. 질서에 순응하는 대지가 아름답다. 결코 죽음이 아닌 안식일게다. 침묵하는 적막이 기다림의 수면 같다. 육신을 비워내고 가벼이 하여 나도 나의 가을을 맞아야 하지 않을까.

약력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필집 ‘바람이어라’‘찌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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