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숙

할머니가 밀고 다니던 유모차를 멈춰 세운다. 유모차에 몸을 기댄 채 꽃이 활짝 핀 등나무를 바라보더니 아예 등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거리가 멀어 할머니의 밝은 표정을 볼 수 없는 게 아쉽다. 지금쯤 할머니는 유모차에게 꽃이 예쁘다느니, 꽃향기가 좋다느니, 말을 건네고 있을 것이다. 그늘에 자리 잡은 것을 보면 벌써 볕이 따가운 계절이 왔음을 알 수 있다. 할머니는 고개를 젖히고 등나무 꽃을 구경하기도 하고 간혹 지나가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지난겨울이었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깔끔한 차림의 할머니가 빈 유모차를 밀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흔한 광경이 아니기에 발길을 멈추고 할머니를 지켜보았다. 몇 걸음 걷던 할머니는 볕 좋은 곳에 유모차를 멈춰 세우더니 거기에 앉았다. 유모차에 앉아 오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는 할머니의 표정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순박해 보였다. 그 모습은 어린아이가 장난감과 대화하는 장면을 연상케 했다.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사람은 대개 아이의 엄마다. 간혹 엄마를 대신하는 보호자일 경우도 있다.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미는 엄마의 경우, 유모차에 누워 있는 간난아이에게조차 말을 건네는 이도 있다.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에는 사랑이 가득하다. 하지만 노인이 미는 빈 유모차는 외로움 그 자체다. 아이가 타고 있는 유모차는 늘 누군가와 함께 하지만 빈 유모차는 언제나 노인 혼자다. 시대가 변하면서 접하게 되는 이색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날 이후 양지쪽에 유모차를 세워놓고 볕을 쬐는 할머니를 자주 볼 수 있었다. 뜻밖의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할머니의 며느리가 옆 동에 산다는 것이다. 얘기를 듣고 보니 나도 본 적이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며 어린아이에게 존댓말을 쓰기로 유명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혼자 사는 시어머니와 따로 사는 조건 아래 이곳으로 이사 온 것이라 말했다. 같은 아파트에 살망정 한 공간에는 살 수 없다는 게 그녀의 뜻이라고 했다. 그녀의 태도가 젊은 세대들에게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라고 판단될지 모른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 싸한 바람이 지나갔다. 그것은 그녀를 이해하는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반감인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런 현실이 낯설지 않다. 그런데 왜 마음 한구석에서는 찬바람이 부는 걸까?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났다.

“너도 늙으면 알게다.”
시어머니는 간경변증이 진행되어 간 기능 부전으로 배에 복수가 차곤 했다. 그 때마다 입원하여 복수를 빼야 했다. 자연 입·퇴원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각오한 일이라 해도 환자를 돌보는 일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고단했다. 시어머니는 아들이나 딸보다 나에게 의지했다. 나는 시어머니의 존재가 짐스러운데, 시어머니는 그런 내 마음도 모른 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너무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못된 며느리라고 호되게 꾸짖음을 당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에게 짜증부리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다가도 침대에 누워 있는 쇠약한 시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싫은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미래의 내 모습도 저렇겠구나 하는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몇 십 년 후의 내 모습. 머지않은 미래에 나도 시어머니가 걸어간 길을 따라갈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어머니는 내 인생 선배인 셈이다.

빈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할머니의 며느리도 언젠가 그 사실을 깨닫겠지. 아직은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하며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기를 거부하는 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할머니가 가고 있는 길이 장차 자신이 가야 할 길이라는 사실을 터득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는 나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빈 유모차를 밀고 다녀야 하는 일은 비단 할머니 세대에서 끝날 일은 아니다. 나와 그녀에게도 전해질 일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때가 되어서 깨닫는 일은 언제나 후회하기 마련인데도 경험해 봐야 알아차린다. 그게 인간의 삶인 것이다. 빈 유모차를 밀고 다니며 유모차와 대화하는 할머니의 헛헛한 심정은 할머니 세대만이 공감할 것이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을 터이다. 며느리로서 풋내기 냄새가 가시지 않은 그녀가 빈 유모차에 외로움이 묻어 있다는 것을 어찌 감지할 수 있으랴. 그저 빈 유모차를 등이 굽고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에게 꼭 필요한 필수품 정도로만 인식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할머니는 아직도 등나무 아래서 꽃향기를 맡으며 나른한 몸을 쉬고 있다. 이 시간 유모차는 할머니에게 편안함을 제공하는 오랜 친구이다. 그러나 유모차가 할머니에게 친구가 되어 준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자식만 하겠는가. 외로움을 채울 수 있는 건 자식이 보내는 다정한 웃음이요, 한마디 말이 아닐는지.

약력
충남 서산 출생
대전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2008.5)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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