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은혜

들에 초연히 피어 있는 꽃.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아릿한 연민의 정이 솟아난다. 빼곡히 들어찬 수풀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애처로움. 겨울에는 죽은 듯이 있다가도 봄이 되면 여지없이 흙을 뚫고 나와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봄은 꽃으로 여름은 푸른 잎으로 가을은 열매로 눈과 마음을 기쁘게 한다. 나는 그런 꽃들을 좋아한다. 야생화의 강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보노라면, 그들의 세계도 우리의 삶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어 보인다.

야생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오래 전 우리 옆집에서 살던 식이네 삼형제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가 돈벌이 나가고 온종일 자기들끼리 지내던 아이들. 그 중 큰아이인 식이는 다 큰 네 살배기 막내 동생을 업고 다녔다. 형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이들의 어머니는 며칠 만에 들어오거나, 아니면 식이를 불러내어 몇 푼의 돈을 쥐어 주곤 돌아가는 듯이 보였다. 그런 날은 아이들의 행동이 달랐다. 온종일 쥐새끼 제집 들락거리듯 문 여닫는 소리가 잦았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다. 풋내가 풀풀 나는 새댁이었던 나는 그 당시 아이들이 안쓰러웠지만, 딱히 해 줄만한 것을 찾지 못 했다. 원래 성격이 적극적이지 않아 쉽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애만 태웠다. 더구나 늘 타인의 눈빛을 두려워하는 아이들에게 다가서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아이들은 무엇을 물어도 묵묵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잘못되면 아이들에게 경계심만 부풀리어 마음의 문을 닫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들은 무리지어 있는 꽃들 속에 외롭게 핀 꽃이었다. 주위에서 따스한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지만, 자기들끼리 잘 견뎌냈다. 길가의 수많은 꽃들 속에 파묻혀 있어도 나름의 속성은 간직하고 사는 야생화와 많이도 닮았다. 또 알랴, 이런 꽃도 사랑하는 한 농부의 손에 의해 빛을 보게 될지. 지금은 작고 초라한 꽃일지라도 새로운 모습을 하고 세상에 다시 나올지도 모른다. 난 그들의 긍정적인 모습을 기다리며 지켜봤다.

이사했다고 정 여사가 야생화를 선물로 가지고 왔다. 강하고 튼튼해 보이지 않고, 여리고 작은 것들이다. 선입감인지 몰라도 야생화라면 아주 강인한 것이려니 했는데, 연약하기가 그지없다. 부실하다. 바람이 불면 실려 갈 것만 같다. 대롱대롱 매달린 작은 꽃들이 처량하다. 내 기존관념이 무너지고 있다. 자리를 정하여 그것을 심고 있는 남편의 옆에서 한참을 바라보다간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래도 화원에서 사람의 손에 자란 것보다야 잘 자라겠지. 그리고 은은한 빛과 향으로 정원에서 제 몫을 훌륭히 해낼 것이라 믿는다.

이참에 야생화 정원을 한번 꾸며보고 싶다고 남편이 불쑥 제안했다. 그것도 고향의 야생화로만 꾸미고 싶다는 거다. 집짓기 전부터 고향의 할미꽃도 가져다 키우면서 준비를 해 오던 터였다. 거기에 정 여사의 야생화를 키워보라던 말이 상당히 영향을 주었을 것이 뻔하다. 결국 우리는 날을 잡아 고향으로 향했다.

요즈음은 야생화에 대해 관심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 야생화 화원이 보인다. 그러나 난 야생화로 정원을 꾸미겠다는 생각이 없어 한번도 둘러본 적이 없었다. 야생화에 대한 지식도 없다. 그냥 집안에 조그마한 동산을 만들고, 고향의 산과 들에 피는 꽃들을 옮겨오고 싶다는 남편의 말을 들어왔을 뿐이다. 고향 마을 입구에도 야생화 화원이 있었다. 남편은 고향집에 들르기도 전에 화원부터 들어간다.

넓은 비닐하우스 안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듯 어수선하다. 넝쿨을 뻗어 천장을 뒤덮은 나무도 있고, 하늘을 찌를 듯 뾰족이 위를 향한 것도 있다. 크고 작은 풀들이 있고 물이 흐르는 징검다리도 있다. 내 주변을 둘러보면 가까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들이다. 이것저것 다 모여 있다. 뜰에 나면 여지없이 뽑아낼 것들이다. 그것들이 한데 모여 꽃동산을 이루었다. 어릴 적 친구 얼굴에 대고 장난을 치던 강아지 풀. 뜰 옆 길가에 있던 질경이. 산나물 뜯으러 가면 우릴 맞던 고사리,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잔대, 현란한 빛으로 나비를 유혹하던 엉겅퀴…….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점포에 들렀을 때 흔히 듣는 인사말로 여겼는데, 가까이 오면서 상대는 나를 안다는 표정으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도무지 기억에 없다.
“기억나지 않겠지요.”
그는 내게 장황히 설명했다.
“김치도 주시고 그랬잖아요.”
식이였다. 어려서 거의 버려진 상태로 살고 있던 식이다. 반가워 손을 덥석 잡고 보니, 사십을 넘긴 남의 사네의 손을 거리낌 없이 잡고 있다. 어른이다. 겸연쩍게 손을 놓으며 잘 살고 있음에 가슴이 벅찼다. 그 식이가 이 화원의 주인이었다. 너무도 우연한 일치였다.

야생화. 누가 보살펴 주지 않아도 제 홀로 세파를 이겨내며 자신의 존재를 간직해내는 야생화. 아무리 강한 태풍이 와도 허리 굽혔다가 다시 일어서는 야생화. 주위에 많은 유혹이 있어도 자신의 특성을 간직해내는 야생화. 그 속에 식이가 있었다.
매번 봄이면 정원의 꽃을 어떤 것으로 할까 걱정이었는데 야생화로 바꾸어 놓으면 좋을 것 같다. 제 스스로 추위도 견디고, 갈증도 해소하는 법을 터득해 살 테니까. 가끔 눈길이나 주고 더 이상 이탈하지 않게 손보아 주면되겠지.
잠깐의 시간에 먼 여행을 다녀 온 기분이다.

약력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필집 “견습일지”
*'수필과 비평' 문학상 수상

새거제신문  saegeoj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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