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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진희 | ||
요즘, 여행지에서 차례를 지내는 생경한 명절풍경이 있다고도 하지만 ‘명절’하면 떠들썩한 대목의 시장, 활기찬 상점들, 가족 안에서의 여유와 따스함 등이 떠오를 만하리라. 그러나 나는 명절 즈음이면 이러한 활기 속에서 마치 길게 난 신작로에 홀로 서 있는 듯한 적막감을 자주 느낀다.
대목 중에서도 대목이었다, 그 날은.
어린 나이에 대목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순 없었으나 부모님들의 분주함, 여느 때와는 다른 피곤한 일과 속에서도 얼굴에 비치는 생기와 한 톤 올라간 목소리에서 대목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요즘이야 명절의 간소화, 생활수준의 향상, 대형 마트의 연일 세일 등으로 '명절 대목'이란 말이 무색하게 느껴지지만 예전엔 그나마 명절이라야 졸라맨 허리띠를 조금 풀 맘을 먹었으니 상인들이 명절 대목에 거는 희망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라도 눈치 챌 정도로 진했을 것이다.
추석 삼일 전, 그야말로 대목 중에 대목이었는데 웬일인지 점심때가 지나자마자 멀리 비탈길을 힘겹게 올라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달려가 안길만도 하건만 그저 옆에 가 말없이 함께 올라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래 떨어져 살다가 학교 다닐 때가 되어서야 겨우 함께 살게 된 아버지가 늘 어렵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볕, 물기란 물기는 다 증발해 버린 듯한 건조한 날씨, 매캐한 흙먼지 냄새는 아버지를 더욱 지쳐보이게 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버지는 피곤하다는 말을 남기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코고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지만 피곤해서라 여겼지, 그것이 멈추려는 심장의 마지막 안간힘이었음은 생각지도 못했다.
추석을 앞둔 상가(喪家)는 쓸쓸했다. 서른 초반의 젊은 어머니는 실감이나 났을까. 차가운 땅에 남편을 묻고 오열하는 그 순간에도 그저 꿈이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넋을 놓고 보낸 시간들이 지나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오히려 남편의 부재가, 혼자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사무쳤을 것이다.
갖은 고생 다해 놓고 이제 좀 살 만하다 싶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허망하게 갈 줄 알았으면……. 대목이 뭐라고, 그렇게 병원에 가보라 했건만 대목 지나면 가겠다더니, 대목 지나고 보자더니. 끝을 잇지 못하는 어머니의 탄식은 그칠 줄 몰랐다.
대목엔 바쁘다. 돈을 벌지만 돈을 버느라 실상 그 돈을 쓸 여유가 없는 것이다. 대목이 지났다는 것은 경제적인 풍족함과 더불어 시간적으로나 마음적으로도 여유가 있음을 뜻한다. 병원 가는 것조차 굳이 대목 뒤로 미루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마흔 초반의 아버지, 서른 초반의 어머니, 나이로 치자면 인생의 대목이라 할 만한 시기이다. 어쩌면 어머니는 대목만 지나면 어여쁘게 화장도 해보고 집안에서 아이들 보살피며 아기자기하게 살아보리라 했을지도 모른다. 방황하며 보낸 젊은 날, 쫓기듯 살아온 날들, 제대로 정주지 못하며 살았던 날들도 대목 지나면 웃으며 이야기할 날 있을 것이라 아버지는 여겼을지 모른다.
내 나이는 이미 그 때의 어머니 나이를 훌쩍 넘었다. 나 또한 대목을 넘고 있는 것인가. 조금 더 형편이 나아지면, 조금 더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조금만 더, 하며 미루는 일들이 하나 둘 아니다. 명절 대목이야 때 되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것이나 인생의 대목이 언제라고 정확히 짚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늘 이보다 더 경기 좋은 대목을 기대하느라 너무 많은 것을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투둑 투둑 빗방울 부딪는 소리가 들린다. 창문을 열자 땅위에 처음 닿는 빗방울을 타고 싸아하니 흙냄새가 올라온다. 문득 지친 아버지가 힘겹게 비탈길을 올라오던 그 날의 메마른 느낌과, 북적북적하던 추석 대목의 활기가 함께 떠오른다.
미루지 말고 사랑할 일이다. 미루지 말고 나눌 일이다.
약력
*대전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재학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새거제신문 saegeoj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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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규 시의원 '경남 의정봉사상'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