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인자

만반의 준비를 한다. 메모해 두었던 순서를 보기 쉽도록 다시 정리하여 냉장고 벽면에 붙인다. 아차 하는 순간에 실패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긴장하면서도 마음이 설렌다. 잘 될지. 스스로도 손재주가 없다고 생각하는 나다. 그런 내가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모험일지 모른다.

첫 작품의 재료로 결명자를 선택했다. 마침 집에 있어서이지만 무엇보다도 초보자인 내게 염색과정이 까다롭지 않아서였다.

물에 담근다. 티나 돌 같은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서너 번 헹군 다음 소쿠리에 받쳐둔다. 먼저, 깨끗하게 닦은 스테인리스 솥에 결명자를 넣고 푹 잠기도록 물을 붓는다. 팔팔 끓기 시작하면 약하게 불을 줄여 삼사십 분 정도 우러나도록 더 끓여준다. 진하게 우러난 결명자 물을 다른 그릇에 따라두고 재차 처음과 같은 방법으로 끓인다. 두 번째 물은 처음의 반만 부어준다는 것이 다르다. 그리하여 먼저 끓였던 것과 섞어둔다.

미지근한 물에 천을 담근다. 이것 역시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염색하는 과정에서 주의할 점은 사용하는 그릇에서부터 재료까지 불순물이 묻지 않도록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크 스카프를 염색할 참이다. 가볍게 주물러 여러 번 헹궈낸다. 혹여 얇은 천이 손톱에 걸려 올이라도 나가면 어쩌나 싶어 여간 조심되는 게 아니다. 한참 헹궈낸 천을 두 손으로 감싸듯 짜 둔다.

우려낸 결명자 물을 대야에 따라놓고 보니 좋은 예감이 든다. 틈틈이 메모도 잊지 않고 본다. 염색물이 옷에 튀지 않게 앞치마를 걸치고 고무장갑도 꼈다. 엎지를 경우에 대비해 마른걸레를 대야 옆에 두고서야 긴장된 마음을 푼다.

무지(無地) 스카프를 담근다. 본격적인 염색의 시작이다. 하얀 천은 빠른 속도로 색을 입기 시작한다. 신기하다. 메모지에 적어 둔 설명대로 넓게 펴서 골고루 물이 들게 앞뒤로 분주히 주물러준다.
점점 옷감의 농도가 진해진다. 십여 분이 지나고 다시 십여 분이 흘렀다. 신기함에 팔 아픈 줄도 모른다. 염색물이 고루 들게 하려면 삼십여 분 동안 물에 잠기게 해서 쉴 새 없이 주물러준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깨끗한 물에 헹구는 일도 만만치가 않다. 염색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만큼 새로운 물을 받아 헹구고 또 헹궈낸다.

물들이는 과정은 넘겼다. 이제 말리는 일이다. 손으로 살짝 짜서 흠잡을 데 없을 만큼 반듯하게 펴준다. 그리하여 바람이 잘 통하는 햇볕에 널어둔다. 이때도 빨래집게를 사용하여 양끝만 집어둔다. 줄에 걸쳐두면 그 부분만 물이 빠진다는 당부가 생각나서다.

얇은 실크 천이라 그런지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다 말랐다. 작품 탄생이다. 거무스름하고 칙칙한 색깔의 결명자가 어쩜 이리도 고운 색을 낼 수 있을까. 병아리의 곱고 부드러운 털 빛깔 같다. 아니 영락없는 개나리꽃이다. 백화점에서 본 어느 스카프보다 예쁘다. 내 손에서 태어난 것이어서인지 이보다 더 예쁜 것은 없을 것 같다. 뿌듯해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다려놓으니 모양이 더 난다. 목에 감아 보기도 하고 셔츠 깃을 세워 살짝 걸쳐도 본다. 거울 속에는 여태 보지 못한 성숙한 여인이 서 있다. 모델이라도 된 양 한 바퀴 돌아본다. 한 주먹도 안 되는 스카프 한 장이 주는 멋스러움을 비로소 느낀다. 자연이 주는 기쁨이다.

첫 염색은 성공이다. 얼룩이 생길까 걱정했었는데, 색깔도 곱고 물도 잘 들었다. 오늘은 결명자로 만든 스카프지만 다음번에는 다른 재료로 근사한 작품을 만들어야지. 슬그머니 자신감이 생긴다.
그 속에는 주위에 물감 재료가 많다는 넉넉함이 들어 있다. 지천에 온통 염색거리다. 쑥이나 들풀도 구하기 쉽다. 화단에 있는 치자도 좋은 재료가 된다. 알맹이는 먹고 밤 껍질만으로 염색물을 만들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겨울 해풍을 이기고 곱게 핀 동백꽃도 좋은 재료이다. 한 가지 더 있다. 반찬으로 쓰고 남은 양파껍질도 천연염색 재료로 쓰이니, 어느 하나 염색 재료가 아닌 것이 없다. 자연에서 얻을 게 참 많다. 그런 혜택을 여태 나만 모르고 있었을 뿐.

아는 얼굴들이 차례로 스쳐 지나간다. 선물하고픈 사람들이 줄을 선다.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단 한 장의 스카프만 만든 것이 아쉽다. 하지만 조급해서는 안 된다. 자연이 주는 선물을 마구잡이로 훔쳐서는 안 되기에 말이다. 나무가, 꽃송이가, 들풀이 가져가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는 느긋함을 배워야 함이다.

인위적인 것에 둘러싸여 몸살을 앓던 내게 천연염색은 활기를 준다. 온통 화학제품에 몸과 마음을 다쳐버린 내게 위안이 된다. 염색을 시작하면서 버릇이 생겼다. 밖을 나서면 재료거리가 없나 나의 눈길이 바빠진다. 평소 무심하게 스쳐 지나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껴 가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예쁘고 멋지지 않은 것이 없다. 저 잎을 물들이면 어떤 색이 나올까? 이 붉은 꽃은?

내 가슴에 차곡차곡 물이 든다. 노랑, 분홍, 그리고 깊디깊은 바다 같은 쪽빛 물이. 튀지도 않고 은은한 빛깔로 내 마음을 사로잡는 색감에 온통 빠져버린다. 내 몸 전체가 자연의 물로 촉촉이 젖어간다.
이젠 주위의 모든 것들이 예사롭지 않은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새거제신문  skj6336@kornet.net

<저작권자 © 새거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