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준화

조그마한 항구도시의 아침이 밝았다. 항구도시의 아침 해는 늘 비릿한 바다내음을 머금고 자란자란 물결일 듯 드리워진다. 작은 도시의 중심가, 관공서들이 밀집한 이곳에도 햇살은 빼놓지 않고 머문다.

‘이런, 서둘러야겠는 걸, 사람들이 몰려 올 때가 되어가네.’
‘오늘은 선선한 바람이 부니까 좀 더 뜨겁게 약간은 진하게 커피를 혼합해야겠군.’
언제나 나의 최고 관심사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자판기커피를 만드는 일이다.

나는 커피자판기다. 인간들의 표현을 빌자면 나는 잘 나가는 자판기다. 사실 이 도시에서 나만큼 맛있는 자판기커피는 없으며, 당연히 사람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물론 내가 자리한 이곳이 목 좋은 건 사실이다. 주위에 도시의 큰 건물들이 대부분 모여 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많은 까닭이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의 커피 맛 때문이다. 그들은 나의 커피를 기절커피라고 부른다. 기절할 만큼 맛있다는 뭐 그런 이유로 말이다.

아침이면 출근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들렀고, 점심시간이면 줄서서 내가 내놓은 커피 한잔으로 입가심을 한다. 그들은 내 옆에 서거나 혹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다. 만년 대리일 줄 알았던 정대리가 승진한 얘기가 들리고, 어느 부서에 비리 제보가 있어 감사에 들어갔다는 소리가 술렁거리기도 한다. 시시콜콜한 농담부터 사내 커플의 사랑의 밀어까지 나와 함께 한다. 이처럼 늘 나를 찾는 이들이 있기에 나의 동전함은 금세 가득 찬다. 두둑한 동전함은 나를 웃게 만들고 내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유난히 바람이 거세다. 바람 탓에 오가는 사람조차 드물다.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 어둠은 더욱 짙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을 헤집고 누군가가 나에게로 조심스레 다가온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나를 열고는 동전함속 돈을 깨끗이 쓸어간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낯선 이의 방문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후로도 몇 차례 계속되었다.

나의 신경은 온통 도둑에게 쏠렸다. 분명 그는 나를 잘 아는 놈이다. 내가 잘 나가는 자판기라는 것, 그래서 언제쯤이면 동전함이 가득 찬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면식범일 가능성이 높다. 차츰 나를 찾아준 사람들이 의심스러웠다. 누구도 믿지 못했다.

‘지켜야 한다. 내 것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나는 그 도둑을 막아야 했다. 쉽게 나를 열지 못하도록 자물쇠를 바꾸고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철창으로 나를 씌웠다 그 누구도 동전함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튼튼하게 보호막을 세웠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커피 맛에 고심하지 않았다. 믿지 못할 사람들에게 맛있는 커피를 대접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그로부터 몇 달 후, 겨울바람이 매섭다. 예년 이 맘 때면 내 커피는 동이 날 지경이었다. 금방 금방 품절 불빛이 켜지곤 했었다. 그러나 머나먼 과거속의 일처럼 가물거린다. 텅 빈 동전함을 칼바람이 할퀴고 간다.

“엄마 자판기가 감옥에 갇혔어. 왜 자판기를 가둬 놨어?”
지나가는 아이의 한마디가 비수처럼 내 가슴에 꽂힌다.

늘 떠나고 싶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끝없이 얽히고설키어진 인연에 얽매어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눈에는 모르쇠를 채웠고, 입에는 자물쇠를 채웠다. 가슴속에 빗장을 걸어놓고서 나 자신만 생각하며 살고 싶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본 것은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나일뿐이다. 사람이 싫어서 막아둔 철창은 나를 지켜준 것이 아니라 나를 가둔 것이었다.

작은 항구도시 커피자판기 앞에서 헛헛한 웃음 지으며 혼자 선 나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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