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애

바람의 기세가 만만찮다. 두꺼운 옷을 껴입고 바람에 질세라 길을 나선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어둠이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을 한다. 뺨이 얼얼하다. 어둠 속에서도 산은 대장군처럼 버티고 섰다. 세찬 바람 때문인지 부담스러워 온다. 몇 걸음 가지도 못했는데 가슴이 아려온다. 찬 기운이 숨길 따라 속을 채우기 시작한다. 눈물이 핑 돈다. 대단한 겨울바람이다. 새해벽두에 나선 해맞이 길이다.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산의 초입에서부터 헉헉대니 남편은 되돌아갈 것을 권유한다. 신년 첫 계획부터 무산하기가 싫다. 가야지. 가자.

스물 두 살 되던 해부터다. 가방 하나 메고 열차에 올랐던 것은. 주머니에 되돌아올 기차비만 계산하고 무작정 나서보던 시기였다. 그 날은 경주였다. 석굴암일출을 보리란 생각이었다. 인연이 닿는 곳에 잠자리를 청해 몇 시간 눈을 부치고 새벽길을 나섰다. 하늘의 별들은 두 눈에 다 넣지도 못하고 남겨두었다. 노 보살님의 설명으로 나선 산길은 별들의 수다로 그지없는 천상이다. 선녀가 된 기분으로 산길을 걸어간다. 길은 좁아지고 인기척이라곤 없는 것이 아무래도 길을 잃은 듯하다. 한참 뒤 흔들리는 불빛이 마치도 어릴 적 얘기로만 듣던 도깨비불을 연상케 한다. 흔들거리며 다가오는 불빛. 나무 뒤에 숨는다. 지나가고 있는 두 도반스님이 든 손전등 불빛이다. 망설이지 않고 나섰다.

“스님~”
나보다 두 도반스님께서 더 놀라신다. 귀신인 줄 알았다면서. 하필이면 내 옷차림새가 흰 티셔츠에 청바지다. 그렇게 우린 친한 친구처럼 웃으며 석굴암에 당도했다. 등산로로 올라온 수많은 인파를 보면서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곧이어 찬연하게 올라오는 해를 맞이한다. 멀리 산들의 무리를 뚫고 올라오는 붉은 해가 장관이다. 가슴 속 타던 갈증을 훑고 내려간다. 이십대 초반의 가슴속은 그야말로 터지기 직전의 분화구였을까.

우리는 불빛이 없다. 그나마 허벅지처럼 허옇게 드러난 작은 길을 내딛을 뿐이다. 아무런 정담도 없었다. 숨고르기에 여념이 없기도 하지만 이십 년 넘게 한 이부자리 인연이라 말없이 한발 한발 내딛어 간다. 미운정도 고운정도 세월의 강 속에 녹여가면서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모습은 아닐까. 헉헉거리는 내 모습이 영 맘이 놓이질 않나보다. 남편이 손을 잡아준다. 장갑을 꼈는데도 마음이 놓인다. 이 손이 나의 불빛이구나 싶다. 코끝이 찡하다. 바람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어제 일이다. 해맞이 간다는 말끝에 친구는 손잡고 잘 다녀오란다.
“손은 무슨 손을 잡아?”
어둠 속에서 혼자 피식 웃는다. 남편은 무슨 생각을 할까 하면서. 콩닥거리는 가슴은 힘들어서인지 좋아서인지 모르겠다. 그의 손은 나의 불빛이 되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손을 잡아줄 때가 많았다. 그가 아니면 내가 손을 내밀었다. 하나가 둘이 되고 가족을 이뤄 살면서 수많은 질곡 앞에 가슴앓이는 또 얼마였던가. 그 때마다 서로의 손 내밀기는 화해와 사랑이었던가.
갑자기 소란스럽다 했더니 온통 붉은 하늘이 화산의 움직임 같다. 새해의 첫 해가 터져 나오는 용암처럼 유혈이 낭자하다. 아름답다.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솟구친다. 저리도 환한 모습으로 피어오르는 불꽃을 보며 타던 가슴이 시원해진다. 두 눈에 담아 눈물로 씻어 내린다. 어두웠던 눈은 이제 환해지리라. 타버린 속내에도 다시 싹을 틔우리라. 미움도 사랑도 하나 되어 따뜻해진다. 해를 바라보며 마음을 비워낸다. 내려가기가 가볍다.

무거운 짐을 풀어버린 기분이다. 그의 손을 잡는다. 역시 수월하다. 어느새 지팡이가 되어있는 손이다. 주위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다들 환한 모습이다. 우리도 마주 보고 웃는다. 새해의 희망들이 행복의 나무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래본다. 나의 희망은 따뜻한 방에서 단잠을 자고 있으리라. 희망을 보러 빠른 걸음을 걷는다. 사랑하는 나의 희망이여.

필자약력

거제대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수료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새거제신문  skj633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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