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옥

훌쩍 떠나고 싶다. 힘겨운 일상에 지쳐갈 때쯤, 자꾸만 꿈속에서 산이 보였다. 꿈을 꾸고 나면 갈증처럼 산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토요일 아침 일찍 잠이 깨어 창문을 열었다. 어스름한 하늘 밑으로 산이 보였다. 이제 막 잎을 틔운 연한 잎들이 온 산을 뒤덮고 있다. 연초록의 새순은 꽃보다 아름다웠다. 산 빛이 이처럼 아름다운 것은 혹독한 겨울 추위를 참고 이겨낸 보상일 것이다. 바람을 타고 숲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순간 숲으로 떠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일었다. 가방을 쌌다. 그리고 식구들을 깨웠다.

지리산을 품으러 집을 나섰다. 드디어 지리산이다. 꿈속에서도 갈망하던 숲이 나를 반긴다. 산의 초입에 들어서자 숲 냄새가 머리끝까지 파고든다. 있는 힘껏 숨을 들이쉰다. 숲 냄새가 몸 구석구석에 흡수되어 정화될 수 있도록. 세상에 찌든 날 흔들어 깨우는 이 냄새가 좋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없다. 오직 숲만 있을 뿐이다.

산의 중간쯤 올라가자 숨이 차고, 맥이 풀렸다. 누군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 같이 몸은 자꾸만 뒤로 처졌다. 저만큼 앞서가는 식구들이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린다. 더는 걸어갈 힘이 없어 주저앉았다. 고개를 숙여 밑을 바라보니 야생화들이 옹기종기 피어 있다. 태양의 빛을 닮은 노란 양지꽃과 잎 속에 자신을 숨긴 수줍은 족두리풀이라는 꽃도 보인다. 야생화는 유독 키가 작다. 고개를 숙여야만 겨우 볼 수 있다. 자연에 고개를 숙이는 자에게 볼 수 있게 하려는 조물주의 계산인지 모른다.

고개 숙인 족두리풀을 보자 문득 그녀가 생각났다. 그녀는 뭐든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곤 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에 내가 동조해주길 원했다. 아닌 걸 알면서 그녀의 생각에 장단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 껄끄럽게 느껴졌다. 차츰 그녀가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녀에게 솔직한 감정을 꺼내어 보여줬다. 그 후 연락이 뜸한 사이로 변해 갔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 손을 내민다. 남편이다. 남편의 손에서 숲 냄새가 났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산 정상이다. 정상이 다가올수록 바람이 거세어간다. 정상의 바람은 사나운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세상의 뿌리 없는 모든 것을 날릴 심산인 것처럼 매섭다. 옷깃을 단단히 여민다. 운동화 끈을 꽉 조인다. 모자는 벗어 가방에 넣는다. 마치 전투에 나갈 전사처럼 우리는 모든 것을 점검했다.

정상에 올라갈수록 나무들의 키가 작았다. 키 큰 나무로 버티기엔 정상의 바람은 너무나 억셌다. 바람을 견디고자 나무들은 자신의 키를 낮추었을 것이다. 바람은 키 작은 나무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나무들의 몸부림이 심해졌다. 나무들의 뼈들이 달그락거린다. 이렇게 바람이 불다가는 나무들이 모두 꺾일 것 같아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그토록 매서운 바람에도 꺾인 나무는 발견되지 않았다. 가만히 나무를 살펴보니, 나무들은 바람 따라 몸을 움직였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몸을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바람의 방향으로 자신의 몸을 눕혔다.
바람이 끊임없이 나무를 흔들며 투정을 부려도 나무는 바람을 나무라지 않았다. 나무는 바람을 조용히 어우르고 있었다. 바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키를 낮추고 바람의 방향으로 몸을 움직임으로써 바람과 화합하고 있었다.

나무와 눈이 마주쳤다. 움찔, 심장이 찌르르 아팠다. 그리고 고개 숙인 그녀가 떠올랐다. 나무는 조용히 나에게 타이른다. 그녀와 다른 의견으로 팽팽히 맞서기보다는 한 발짝만 물러서서 바라봐 줄 수 있는 아량을 가지라고.
드디어 노고단 정상이다. 정상의 바람은 더욱 거세다. 하지만, 바람은 나무를 뿌리째 뽑지도 않았고, 정상 가득 피어 있는 진달래 꽃잎도 모두 떨어뜨리지 않았다.

바람의 방향에 몸을 맡긴다. 이젠 바람이 두렵지 않다. 바람이 나무를 스치자 나무에서 휘파람소리가 들렸다.
휘파람을 배워야겠다. 어쩌면 바람 부는 날, 그녀를 불러내어 휘파람을 불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약력
*거제대학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수료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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