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희

한 잔 하러 가는 길이었다. 늘 마음을 무겁게 하던 논문 과제를 마쳐서 기분 좀 내려는데 그동안 과제 핑계로 친구들 부름에 거절해오다 보니 정작 이런 날은 도리어 친구들이 바쁘단다. 그렇다 해도 친구들에게 서운해 할 얼굴은 없다 여기고 있었는데, 남편에게서 오래간만에 밖에서 한 잔 하자는, 눈이 번쩍 뜨이는 연락이 왔다. 들뜬 아이마냥 남편의 팔에 매달려 들어갈 술집을 찾고 있는데 기분 좋은 간판이 눈에 들어와 박혔다.

'술을 즐겨라'
오늘 같은 날 딱 맞는 주문이다 싶다. 사실 과제를 마치기 얼마 전부터 끝나기만 해보라며 벼르고 별러왔던 날이었다. 간판까지 흥을 돋우니 기분은 한껏 고조되었으나 이런 마음이 너무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싶어 그 집으로 들어가자는 말은 삼켰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던 듯이 착착 맞아 들어간다고 여겨지던 참에 전화벨이 울렸다. 그 아이 엄마였다. 통화를 끝내고 먼저 들어가 기다리고 있던 남편과 술잔을 주고받았지만 이미 전화를 받기 전 기분이 아니다.

강의를 나가고 있는 초등학교의 특기적성 수강생 중에서 6학년은 단 한 명뿐이다. 그런데 그 녀석은 늘 아래 학년 학생들과 말썽을 일으켰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아래 학년 학생들을 괴롭힌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어려운 형편 탓으로 엄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게 눈에 보여 마음이 쓰이는 아이들이 많다. 그런데 그 불쌍한 아이들에게 그 녀석은 심술궂은 장난을 하고 윽박지르고 하는 것이었다. 오늘만 해도 한 아이의 신발이 없어져서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신발은 엉뚱한 사물함 안에서 나왔고, 난 당연히 그 녀석을 추궁했지만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는 통에 그저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일침을 가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쀼루퉁한 얼굴로 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좀 더 추궁해서 버릇을 고쳐 놓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은근히 후회가 되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엄마가 낮의 일로 느지막이 전화를 한 것이다. 전화를 하기엔 다소 늦은 시각이라는 것과 평소 그 아이로 봐서 엄마도 만만치 않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 왔다. 그런데 낮의 일과 평소 아이의 태도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하니 의외로 일에 치여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하는 사정을 이야기하며 오늘은 ‘애기가' 많이 속상해하더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잘 부탁드린다는 깍듯한 인사에 오히려 머쓱해지고 말았다.

'애기'라. 내겐 항상 연약한 아이를 괴롭히는 심술궂은 아이요, 가해자요, 편들어 줄 여지를 주지 않는 아이였건만 엄마에겐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해 늘 안타까운 '애기'인 모양이다. 그 '애기'가 저녁까지 속상해 하는 모습을 보고 어렵게 전화를 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낮에 있었던 일이 혹시? 그러다 이내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심술궂은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무언가 명쾌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녀석을 볼 땐 항상 누굴 건드리고 있진 않나 하며 보살펴 주고 싶은 아이들과 엮어서 생각했던 것 같다.

물증은 없었지만 심증이 가는 일이 한두 건이 아니었다. 끝까지 아니라는 아이에게 알았다고 대답은 했지만 마음속에선 늘 '너 아니면 누가'라는 굳은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땐 그리도 확신에 차 있었던 마음이 지금에 와선 영 자신이 서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자신을 보살펴주고자 하는 마음을 알고는 잘 따르고 의지하는 아이들과 같이 그 아이 또한 내가 자신을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섭섭함, 선생님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마음 때문에 내가 감싸는 아이들에게 더 심술궂게 대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안 된 아이들을 보살펴 주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 녀석에 대해선 제대로 보려는 노력조차 접어둔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마음이 점점 무거워져 갔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올 때의 날아갈 듯한 기분은 어디로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었는지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힘겨루기를 하고, 이러 저러한 느낌들이 두서없이 비집고 들어 말문을 닫게 했다. 때도 잘 맞춰 연락해 왔다고 남편에게 한껏 아양을 부리며 이 길로 들어섰던 때와는 다르게 가라 앉은 분위기가 마음에 쓰였다. 집에서 나설 때의 기분으로 돌아가고파 그 간판을 찾아보았다. 잠시 혼란스러웠던 마음에 주문을 걸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술을 즐겨라'
오늘만큼은 복잡한 것 생각지 말고 즐겨보자 싶었다. 그런데 그 간판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간판이 변신을 일으켰다. 갑자기 무언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으로 유심히 살펴보았다. 간판은 벽보다 들어가 있는 문에 부착되어 있는 현수막으로 저쪽에서 볼 때는 벽 때문에 맨 앞의 글자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현수막이 어떻게 버젓한 간판으로 보였는지 무언가에 속은 기분이었다. 가다가 한 번만 더 보았어도 이렇게 황당한 경험을 하진 않았을 거란 생각에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이 났다. '술을 즐겨라'가 아닌 '미술을 즐겨라'라는 건물 2층 미술학원을 홍보하는 문구였던 것이다. 어찌 간판이 변신을 일으켰으랴. 무언가로 한 꺼풀 씌워진 마음에 똑바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문득 낮에 쀼루퉁했던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 사실은 교실 문을 나서는 그 녀석 뒤에서 끝까지 추궁했어야 했나 망설이고 섰던, 녀석이 선생이라 부르는 사람이 떠올랐다.
술을 즐겨라? 미술을 즐겨라.

약력
*대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중
*『수필과 비평』신인상 수상 <2006.3>
*한국문인협회 회원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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