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태

캐럴 소리가 등 뒤에서 멀어져 간다. 코트 깃을 잔뜩 세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그 길 위로 겨울바람은 물기 없는 낙엽을 몰고 온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낙엽이다. 그냥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질주하는 차바퀴에 깔리기도 한다.

낙엽은 카멜레온처럼 느껴진다. 화려한 단풍 뒤의 가을 낙엽은 탄성과 아쉬움을,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고 지날 때 만추의 낭만을 물씬 풍겨서 좋다. 적어도 늦가을까지의 낙엽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바싹 말라버린 겨울 낙엽을 보면 그 화려했던 색상은 흔적조차 없다. 사람들의 눈에 밟히는 낙엽이 아니라 발밑에서 밟히는 한갓 쓰레기일 뿐이다. 몸뚱어리는 잔뜩 움츠러들고 생기 없는 모습으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에게 있어 겨울 낙엽은 항상 연민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단풍이 낙엽으로 변할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데굴데굴 바람에 굴러다니는 겨울 낙엽은 쓸쓸함과 공허함을 남길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오늘 집으로 오는 길에서 본 낙엽은 그런 느낌이 없다. 문득 가지를 떠나 거리를 떠도는 처량한 낙엽에서 피안의 세계를 보았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철학적인 발견도 아니다. 낙엽이 마지막 가는 곳을 알고부터다.

낙엽은 봄비가 오면 방황을 끝내고 말없이 썩어 어디선가 그 무엇의 거름이 된다. 거기에는 망설임이 없다. 아낌없이 몸을 던져 초록의 꿈을 갈망할 뿐이다. 그 길이 낙엽이 소망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낙엽을 연민(憐愍)의 대상으로만 바라본 내 정서의 빈약함에 부끄러움이 일어나는 이유다. 이제 겨울 낙엽을 보아도 의지할 곳 없는 어느 소년소녀의 가련한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다. 언젠가 썩어 미생물의 먹이가 되고 이름모를 식물의 자양분이 될 낙엽이기 때문이다.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안도현의 시 ‘연탄 한 장’에서

연탄은 제 몸 태워 누군가를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게 하는 존재다. 그러나 제 몸에 불을 붙이지 않으면 한갓 연탄일 뿐이다. 한 덩이 재로 남을 때까지 연탄은 자신을 태운다. 빈터 한 구석에 수북이 쌓인 연탄재와 환경미화원이 쓸어다 모아 놓은 낙엽은 닮았다. 모양새가 닮은 게 아니다. 연탄재는 이미 자신을 태워 주위를 따뜻하게 했다. 낙엽은 자신을 썩혀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다른 식물의 자양분이 되고자 봄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타지 않는 싸늘한 연탄과 썩지 않는 낙엽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겨울 낙엽은 폐부를 찌르는 그 무엇이 있다.

비록 짧은 순간일지라도 단풍처럼 만인의 가슴에 즐거움을 준 적이 없는 사람. 진정으로 남을 사랑한 적이 없었던 사람. 생의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지 못한 채 하염없이 표류하는 사람. 낙엽처럼 제 몸 썩힐 줄도 모르는 사람임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쩌면 낙엽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내 모든 삶이 자신에게 귀결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은가. 그것을 성공으로 알았고 성취감에 도취되어 살았을 뿐이다. 비록 한 무더기 거름이 되더라도, 겨울 낙엽처럼 의미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약력
*거제 둔덕 출생
*거제시 주민생활지원과장
*거제대학 평생교육원 수필 창작반 수료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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