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 미 희

밤새 눈이 많이 내렸다. 온통 하얀 세상이 참 좋다. 나 자신까지 같이 흰색으로 동화되어버릴 것만 같다. 아이들을 깨운다. 춥다고들 아우성이다. 난방을 넉넉히 하지 않는 어미를 원망하는 소리가 드높다. 거기에 덧붙여 빨리 봄이 오고 여름이 왔으면 좋겠다고 한다. 여름엔 또 빨리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기를 기다리겠지. 나 역시 사계절이 모두 좋다. 봄은 움츠렸던 네 활개를 활짝 펼 수 있어 좋고, 여름은 덥지만 아름다운 산과 들이 있어 좋고, 가을은 모든 것이 풍성해서 좋고, 겨울은 춥지만 새하얀 눈 때문에 운치 있어 좋다.

개구쟁이 막내아이를 탓하며 손세탁을 해야만 할 빨랫감들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대부분의 겨울옷들은 물을 먹으면 감당하기 힘들만큼 무겁다. 그 중에서도 오리털 잠바는 더 무겁다. 며칠 전 옆자리 직원이 던진 한마디 말이 물 먹은 오리털 잠바처럼 무겁게 머릿속을 맴돈다. 그녀의 의중을 몰라 자꾸만 곱씹어 보았다. 처음엔 생각 없이 던진 말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기분 나쁘고 속이 상하는 건 시간이 갈수록 더했다. 무엇이건 쉽게 흘려버리지 못하는 내 성격 탓이겠거니,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잊어버리고 싶지만 잊혀지지가 않는 말이다. 생각할수록 뭔가 오해가 있지 않나 싶었다. 오해가 있다면 풀고, 짓밟힌 자존심도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그녀를 찾았다.

그녀의 반응은 놀라웠다.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따져 물었더니, 자신이 그런 말을 한 기억은 없지만 했다고 하더라도 뭘 그런 걸 가지고 따지고 상처받고 그러느냐고 한다. 어이가 없다. 나는 나름대로 말을 가려서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내 깜냥은 최대한 상대의 편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스치는 바람도 낙엽의 행로를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철칙이었다. 듣는 것, 역시 내편에서만 들어서는 의사소통이 원만하지 않다.

그러고 보면 말이란 참으로 다양한 표정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타인의 말 한마디에 찡그리거나, 웃거나, 화를 내거나, 행복해 할 수도 있다. 또 말이란 어쩌면 사계절을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십대 이십대는 젊다. 그들의 말에는 무게가 실려 있지 않다. 얇고 가볍다. 그러나 때로는 후텁지근하다 못해 기분 나쁘게 끈적거리며 눅눅하기도 하다. 여름 더위가 그 속에 있다. 짜증과 화가 솟구친다. 그러므로 스스로 냉방장치를 가동하지 않으면 간혹 폭염 같은 말에 질식해버릴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때론 여름 빨래처럼 금세 마음을 가볍고 깨끗하게 할 수 있어 좋기도 하다.

삼,사십 대의 말은 가을을 닮아 있다. 모자란듯하면서도 풍족하고 풍족한 듯하면서도 부족하다. 아침저녁 쌀쌀하고 춥다가도, 한낮의 햇살은 여름처럼 따갑다. 상대에 따라 말이 달라진다. 삶의 무게를 느끼므로 처세의 방법을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을 단풍처럼 갖가지 형색(形色)의 언어를 구사한다. 그러므로 이들의 말은 단풍잎인지 은행잎인지, 붉은색인지 노란색인지 구별하며 들어야 한다. 산을 볼 것인지 나무를 볼 것인지도 생각하며 들어야 한다.

오십 대나 육십 대의 말은 겨울옷 같다. 상대를 포근히 감싸준다. 그들이 살아온 날들 하나하나, 언어들 하나하나가 모아져 따뜻한 방한복이 되어준다. 그들 앞에서 내 옷이 무겁게 느껴진다면, 그만큼 내 몸과 마음이 오염되어 있다는 뜻이다. 오염된 몸과 마음을 느낀다면 그들의 조언이 가끔은 물먹은 오리털 잠바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칠,팔십 대의 말은 봄이다. 그들에게는 언 땅을 녹이고, 새순을 돋게 하는 힘이 있다. 그 깊은 뜻을 몰라 때로 우리는 성급히 여름옷을 내어 입기도 한다. 언 땅을 녹이는 힘을 모른척하고, 혹한을 물리치는 방법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때로는 힘들고 아프다는 핑계로 옳은 것을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들은 척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답게 사는 것은 그 아픔을 피하지 않고 그것마저 잘 소화해 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하나의 계절만 있다면 지겹고, 힘들고, 재미도 없을 것이다. 네 계절이 있어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설렘과 기대감이 있듯이 언어에도 이런 변화가 있기에 서로의 만남이 설레고 기대되는 것이 아닐까. 누구나 자기 나이에 맞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자연의 변화가 계절을 조금 늦추기도 하고 또 빨리 오게 하기도 하듯이, 개인의 인성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조금씩은 다를 것이다. 타인의 말을 들을 때는 그 사람의 나이도 생각해 보며 들어야 할 것 같다. 마찬가지로 내 언행도 나이에 어울리게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말의 표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재미있고 즐겁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은 어느 계절을 닮아 있는지 생각해봐야겠다.

약력
*경북 영주 생
*한울 독서문화원장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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