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헌
/거제대 교수

작은 섬에는 사슴이 산다. 인근 큰 섬에서 방목되던 사슴은 어느 날부터 밝은 달빛을 기다린다. 그리고 보름달이 만든 길을 따라 작은 섬으로 이동한다. 언젠가 섬을 찾았을 때 토박이 노인은 스스로가 해본 짐작이라며 이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달이 밝으면 섬 사이에 달길이 열리고 그 길을 따라 다른 섬으로 걸어간다는 사슴의 사연은 의문인 듯 사실인 듯 아직 마음에 남아있다.
달리 무인도 작은 섬에서 누군가가 사슴을 기르지 않았다면 그곳에 서식하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신비감을 주는 이 사연은 다만, 그만이 비로소 자신이 살던 큰 섬 전체를 볼 수 있었을 것을 짐작하면서 달길 걷는 사슴을 부러워한다.

세밑이다. 2006년이 저문다.
휴일을 기해 모아둔 지역신문들을 읽으며 희로애락을 되짚는다.
시민 20만 돌파가 눈에 든다. 이 사실이 모두의 꿈인 양 화려한 기사와 자축하는 행사가 이어진다. 이제 거제는 중견도시다. 그리고 하반기 발행된 첫 신문에는 모든 곳에서 지방선거 결과를 싣고 있다. 당선한 시장의 환한 얼굴과 시의회 의원들의 날선 모습이 담대하다. 이어 선거결과에 대한 분석과 주문이 다양하게 게재되며 시민기대를 높인다.

발행날짜를 달리한 곳에서는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연장 이후 내방객 증가와 조선을 비롯한 물류시스템의 개선이 보도된다. 더불어 양대조선에서 달성한 수주금액이 사상처음으로 200억불을 달성하였다는 소식이 굵은 머리기사로 등장한다. 연중 계속된 보도로는 대우조선해양 매각 건과 고속도로의 거제연장 그리고 가칭 거가대교의 건설현황 등이 이어지며 상세하다. 그리하여 초미의 관심이 모이고 시민은 외형적 변화와 그에 따른 각자의 기대에 분주하다. 이변을 앞둔 게 분명하다.
또 새로운 학교가 들어서고, 자녀의 참교육을 위한 고교평준화제도 수용운동이 보다 구체적 대안을 통해 접근해가는 대목에서는 거제의 기운이 넘친다.

더불어, 3만불을 다가가는 시민경제상황은 이에 걸 맞는 브랜드 가치를 앞세운 대형아파트의 신축허가 봇물로 이어지고, 그때마다 분양가는 갱신되고 있다. 이런 상황 때문인가, 결국엔 재경부로부터 토지투기지역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도 있다. 때마침 독봉산 자락의 삼성주택조합 사업허가와 더불어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고, 이를 둘러싼 억측은 난무하며 많은 이름이 등장한다.

9월로 들어서면 현직 시의원이 연루된 소위 ‘쓰레기게이트’가 화재의 새로운 진앙지가 된다. 시행정은 물론 관련업체 전반에 소용돌이친 본 사건은 아직 진행 중이지만, 업체선정 시 수의계약의 불법성과 공영제도입이 초미의 관심을 모으고 있고, 이에 시민의 따가운 시선은 무뎌지지 않고 있다.

현재, 거제는 조선산업의 초강세와 사회적 인프라(하부구조)의 개선으로 절로 발전하는 양상이다. 희망에 찬 외지인들의 유입이 늘고, 이에 상반하여 곳곳에서는 발전통(發展痛)을 겪는다. 더불어 토착민들의 한 서린 호소가 삼거리에서 송진포까지 이르며 질적인 형평성을 요구한다.
한편, 시민단체는 올 한해 극명하게 다른 정체성을 보였다. 이전부터 실행견해를 달리하면서도 공익을 위한 공동의 목적과 목표를 구사하던 단체들은 이제 연대의식조차 실종시켜가고 있다. 나아가 개인을 폄하(貶下)하고 새로운 대체세력을 마련해야 한다는 소리조차 들리기 시작했다.

사회는 진화한다. 거제도 진화 중이다. 급속한 변화를 예고하며 출범한 현 정부는 여러모로 세밑의 외롭고 마감하는 분위기다. 내년이면 정부보다 더 큰 모습으로 몇몇 개인이 등장한다. 이에 따라 지역혁신과 혁신도시, 참여와 개혁, 갈등해소와 역사바로세우기, 행정복합도시와 분권화, 양극화와 비정규직, 사립학교법과 종합부동산세제 등이 곧 변형되거나 폐기될 수도 있다. 새로운 변화에 발빠른 소수가 다시 등장하는 형국이 당연지사로 반복되며 전개될 것이다.

이번 주는 그믐달이다. 그리고 초승달이 뜬다. 그사이 삭일(朔日)이 있어 어둡기만 하다. 이 빛에서도 달빛물길을 걷는 사슴은 없다. 걸어가지 못한다면 이제 어둠을 기해 내면으로라도 들어가자. 그리하여 한 해 동안 쌓아온 빚을 갚지 못한다면 탕감이라도 바라야하겠기에. 마구 흘린 말과 허술했던 행동을 질타하고 바르지 못한 판단과 미련해 저질은 착오를 괴로워하자.
갈등도 있었다. 겸손치 못한 일도 아른거린다. 미움이 아니었어도 애써 외면한 일이 있고, 부족하면서도 기능을 다하겠다는 염치없는 일도 있었다.

도덕(道德)은 행동(行動)과 인지(認知)와 정서(情緖)에 뿌리를 둔다. 행동이 옳고 인식이 바르며 현명한 판단의 정서가 있어 서로의 복지를 위하고, 사회행복을 위해 해야 할 일을 다시 새겨야겠다. 그리고 이것이 단 한사람으로부터의 개념에서라도 시작하여 사회를 배려하는 길인 것에, 그 길을 찾는 지혜를 사슴에게 물어보리라.
똑 같은 하루라도 세밑은 그래서 겸허해진다.

이동열  skj633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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