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돈 묵
/거제대교수

이 해도 한 장의 달력만을 남겨두고 있다. 그 어느 해보다도 마지막 한 장의 달력을 바라보는 감회가 씁쓸하다. 이때쯤이면 성탄을 맞아 어려운 이웃도 챙기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 달력이라도 구해 보며 새해에 대한 구상을 하기에 바쁠 텐데 이번에는 전혀 그런 것이 없다. 새해에 대해 거는 기대도 없고, 궁금증마저 소진해 버린 것 같다.

너무도 힘들었던 지난 한해. 무엇인지 모르는 것에 이끌려 숨쉴 틈 없이 달려 왔건만, 지금 이 순간 생각해 보니 무엇을 향해 달려 왔고, 왜 그랬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한참 지난 지금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으니 난망하기 그지없다. 온 힘을 다하여 저 멀리 보이는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왔는데, 느닷없이 눈앞에 안개가 끼어 보이지 않아 절망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어리둥절해 하는 것이 지금의 내 솔직한 모습이다. 그리고 확언은 못 해도 많은 국민이 느끼고 있는 기분이 이렇지 싶다. 신뢰할 수 없는 말에 이제는 모두가 지쳐 있는 것이다. 어느 말을 믿고 살아야 하는지조차 가리지 못한다. 누구의 말인들 온전히 믿고 따라갈 수가 없다. 우리 모두 따라 했다가 바뀌어 버린 말에 허둥대어 본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 가장 가슴 아픈 일은 가치 기준이 혼동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잣대로 현실을 재다가는 낭패하기 십상인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러한 세상은 말에서 비롯되었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여 그리로 휩쓸리고, 바뀐 말에 따라 수습하다 보면 다시 뒤집어지는 현실 속에서 망연히 하늘만 바라본 한해였다. 차라리 아무 말이 없었다면 강물이 잔잔히 흘러가듯 갈 수 있었는데, 느닷없는 말에 그만 낭떠러지를 만나 우당탕 솟구치고 추락하는 아픔을 거듭해 왔다.

올 한해를 무슨 어휘로 정리할 수 있을까. 다언삭궁(多言數窮)이나 견강부회(牽强附會) 중 어느 것이 더 합당할까 고민 중이다. 너무 말이 많아서 궁해진 한해인 것도 같고, 가당치도 않은 말을 끌어다가 붙여 억지로 맞추려 한 한해인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금년 한해는 말(言)로 인하여 화가 미친 경우가 너무 많았다. 그 말들에 이끌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살다보니, 이제는 온몸의 힘이 소진해 버리고 일어설 기력조차 잃은 것이다.

이런 현상이 위에서부터 자행되다 보니, 밑에서도 그것을 모방하여 거침없이 따라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온통 식언이 판치는 세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잠시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자행된 「나 모르쇠」식의 태도가 이제는 전 국민들의 삶의 양상이 되어 가고 있음이 가슴 아픈 일이다. 언론에 보도되는 식언들이 그리 많으니,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인들 또 얼마나 많겠는가.

하나의 잘못된 흐름을 바로잡으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어찌되었든 현실 인식이 되었으면 바로 잡아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전 국민이 도덕재무장운동이라도 벌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에 묻어둔 양심을 다시 밖으로 끄집어내야 한다. 그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가치를 판단하는 구체적인 방도를 모색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사회가 이루어질 것이고, 밝은 사회가 찾아올 것이다.

우선 말부터 줄이고, 한마디 말을 하기에 앞서 그 말이 갖는 의미도 헤아려보고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도 깊이 고뇌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듣는 자세부터 익혀야 한다. 내 안에 있는 생각은 언제나 내 편에 서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도 다른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제는 모호한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 치
밀하고 구체적인 삶의 태도를 견지할 때가 되었다.

자신의 말을 반드시 책임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메모를 습관화하는 일부터라도 시작했으면 좋겠다. 우리 민족은 대화를 하면서 상대가 메모를 하면 질려서 말을 못한다. 왜냐하면 책임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상대가 메모를 하던 녹음을 하던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책임을 진다는 정신만 살아 있다면 전혀 개의치 않아도 된다. 그런데 책임의식을 유념하지 않고 살아왔기에 메모 앞에서는 말문이 막히는 것이다. 이제 식언하지 않고, 말장난하지 않고, 신뢰로 구축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할 때인 것 같다.

실야 마이크 앞에서 큰 소리로 외치고, 기자들의 녹음기에 생생히 남아 있는 자신의 말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정치인들의 모습만 보아온 억울한 국민들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요구할 수 있을까. 식언과 불신으로 얼룩진 이 한해의 마지막 달력을 넘기면서 신뢰와 믿음이 숨쉬는 세상이 되길 꿈꾸어 본다.

전의승  skj633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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