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영 천
/거제경찰서 부청문감사관

한국인의 법률상식 제1호는? 『돈(빚) 받으려면 고소(告訴) 해라』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억울한 일이 생기면 고소하는 것을 능사로 여긴다.

민사(民事)건 형사(刑事)건 사건의 성격을 떠나 고소야말로 가장 손쉬운 법률 구제 수단쯤으로 인식하고 있다. 고소란 범죄 피해자나 배우자, 법정대리인, 직계친족 등이 범죄 사실을 수사기관에 신고하고 범인의 수사 및 소추(訴追)를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도 지난 한해동안 수사기관에 고소당한 사람이 자그마치 65만여 명이다. 우리가 민족성 평가에서 그다지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이웃나라 일본의 160배에 이른다. 하지만 이 가운데 검사가 죄를 인정하여 기소한 사람은 17% 가량으로 11만명이 조금 넘는다. 나머지 54만여 명은 모두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러니 법원의 최종 재판 결과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 싶다.

거제경찰서에서 작년 한해 처리한 고소는 전체사건의 35%(3,500여건)에 이른다. 이중에 돈과 관련된 분쟁으로 고소한 사건이 68%(약2,400건) 였는데 기소율은 전국 평균치인 17%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우리 지역 역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필요한 고소를 하고 또 고소를 당하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죄종(罪種)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해도, 불기소 처분을 받은 대부분의 사건은 모두 경찰이나 검찰에서 다룰 수 없는 민사(民事) 사안의 고소였다.

고소를 당하면 그 고통이 가족 전체에 미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고한 54만여 명의 당사자와 가족들이 입은 정신적, 경제적 손실은 실로 엄청날 것이다. 거의 매년 국민 20-30명 중 한명꼴로 피고소인이 되어 수사기관에 불려 다니는 나라! 이런 나라가 바로 동방에서 가장 예의 바르다는 국민들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요즈음도 경찰이나 검찰 등 수사기관은 폭증하는 고소사건 때문에 신음하고 있다. 고소사건을 전담하는 경찰서 수사과 지능팀(구:조사계) 소속의 조사경찰관들은 매월 30-40건에 이르는 고소사건을 처리한다. 사건보유량도 진정이나 탄원사건을 합하면 1인당 대개 60-80건에 달한다. 최근 들어 급증하는 사이버범죄까지 처리하다 보면 거의 매일 파김치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니 한 사건에 제대로 집중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일부 사건당사자들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경찰이 『불공정하고 무성의하다』는 투의 민원을 제기하여 괴롭히기도 한다.

검찰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검사들은 한 달에 300여건의 사건을 처리한다. 검찰청에 접수된 고소사건은 직접 수사도 하지만 수사인력이 모자라 「수사지휘」 형식으로 경찰로 사건을 보내 수사토록 하는 경우도 있다. 주로 경찰 등 1차 수사기관에서 접수, 송치한 사건을 검토하거나 보강하여 검사가 기소, 불기소 결정을 하는데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폭증하는 사건 속에 파묻히다 보니 간혹 중요한 사건이 뒷전으로 밀리는 경우도 생긴다.

「민팔사건」이란 말이 있다. 「형사고소 팔할(80%)이 민사성격의 사건」이라는 뜻의 검찰 은어(隱語)다. 이 「민팔사건」은 돈을 떼이거나 물품대금을 받지 못하는 등 거래관계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구나 최근 급증하는 신용카드, 홈쇼핑, 통신판매, 캐피털, 대부업체들의 할부금 연체나 대금변제 관련 고소사건은 3건 중 2건이 불기소 처분을 받을 정도로 심각하다. 마치 수사기관을 채권 추심 기관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묻지마 고소」에 상당한 수사력이 낭비되는 동안 정작 법률적 수혜를 받아야할 억울한 피해자의 권익은 뒷전으로 밀리기 십상이다. 따지고 보면 결국 고소 남발(濫發)의 피해는 국민 스스로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동안 수사기관에서는 급증하는 고소사건을 제대로 처리하기 위하여 상당한 노력과 고심을 거듭하여 왔다. 즉일조사제나 고소책임수사관서제도 같은 경찰의 개선책이나, 현재 시행중인 고소 각하제도를 강화하는 것을 비롯한 검찰의 고소사건 조정제, 고소장 선별 수리제도 등 다양한 해법이 제시되고 있으나 국민들의 반응은 별 신통치 않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우리 국민들은 고소를 좋아하는 걸까?
흔히 하는 말로 「민사는 늦고 형사는 빠르다」는 단순한 이유만은 결코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은 현행 민사구제 제도를 절차와 효과면 에서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물론 각자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물려 있는 사건이 쉽사리 해결 될 리 없다. 그러나 민사소송으로 해결되어야 할 많은 사건이 왜 형사고소로 이어지는지 진지하게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법조인들은 이 문제를 법률적 논리로만 보지말고 현행 법률절차의 모순을 국민적 시각에서 찾아보고 이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한편으로는, 우리 내부적 의식의 모순도 도외시 할 수 없다. 상호 분쟁이 생기면 합리적 논리 제시나 타협보다, 당장 결판부터 내고 보자는 「빨리 빨리」 심리가 사회적으로 만연되어 있다. 이런 양상은 소위 개발독재와 군사정권 시절을 거치며 원칙보다 술책(術策)이 더 통하면서 우리 정서 속에 고착화되어 버렸다.

정당한 법률절차와 원칙을 중시하기에 앞서 일단 고소부터 해놔야 상대의 기를 꺾을 수 있다는 잘못된 관념이 뿌리깊게 박혀 있다. 그 과정에서 일부 부패한 관료들의 일조(一助)도 부인할 수 없다. 억울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 주기는 커녕 청탁성 고소를 받아주고 중간에 돈을 챙기거나 브로커 노릇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누구든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는 민사소송보다 형사 고소는 잘만 하면(?) 훨씬 빠르고 가장 손쉬운 해결수단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우리는 동방고소지국(東方告訴之國)을 뛰어넘어, 세계에서 가장 고소 잘하는 국민으로 우뚝 서게 되었으니......

전의승  skj633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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