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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명예교수(전 고려대 언론대학원장)
「20만」 「200억」 「제일」 「최고」....거제에서 발행되는 신문들뿐만이 아니라 전국의 유력 언론매체들이 요즘 거제에서 연이어 터지는 경사를 소개하면서 지면과 화면을 장식할 때 사용하는 단골 수식어들이다. 20만은 거제시 인구가 20만 명을 돌파했고, 200억은 거제의 양대 조선사가 200억 달러 수주를 돌파했고, 제일과 최고는 거제시민의 소득과 경제력이 경남에서 제일이고 최고 수준에 올랐다는 뜻이다. 거제의 소비수준은 서울의 강남에 버금간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아무튼 가슴 벅차고 자랑하고 축하하고 기뻐하고 부러워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한 마디로 거제시민들은 요즘 살맛난다.
그런데 화려한 수식어와 수치의 이면에는 뭔가 불안하고 위험한 요소가 담겨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지금과 같은 호황이 앞으로도 지속되고 보장될까 아닐까?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계속 받게 될까 아닐까? 사람들이 거제시민에게 계속 관심을 가질까 안 가질까? 제일과 최고라는 명예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아닐까? 그 가능성은 50:50이라고 보면 옳을 것이다. 무엇이든 편중되고 집중되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역경제가 한 가지 특정 산업에 지나치게 편중되고 의존하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가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조선 산업은 워낙 탄탄해서 오랜 기간 동안 현재와 같은 호황이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진단하는 사람들이 많다.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도 나는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생각을 자꾸 하게 되는데 왜 그럴까? 아마도 조선대국으로서의 독일의 위상이 허무하고 우습게 무너지는 현장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인 것 같다.
1965년 여름 나는 유학생의 신분으로 독일 땅을 처음 밟았다. 2차 대전이 끗 난지 20년이 되던 당시 서독은 전후복구 사업을 거의 마무리 하고 경제성장이 최고조에 달하던 때였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생산인력이 부족한 독일에 일자리를 찾아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Made in West-Germany가 붙은 제품들은 명품 대접을 받으면서 세계시장을 주름잡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선박이었다. 최빈국 한국에서 날아온 젊은 유학생의 눈에는 독일의 모든 것이 마냥 부럽고 신기하기만 했다.
독일은 세계 1차 2차 대전을 치르면서 무기와 군수물자 개발과 생산에서 세계 최고임을 자부했다. 잠수함과 같은 가공할 무기를 개발한 독일은 특히 선박건조 분야에서는 독보적이었다.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인 킬, 함부르크, 브레머하펜 등은 독일뿐만이 아니라 유럽 조선 산업의 중심지로 각광받던 도시였다.
그런데 독일 경제가 최고 호황을 누리던 1960∼70년대에 대학과 노동계가 이념투쟁의 세력으로 바뀌면서 독일은 파업과 시위로 해가 뜨고 파업과 시위로 해가 지는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노동자와 사용자가 기업의 모든 것을 공동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이른바 공동결정권(Mitbestimmungsrecht)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과격한 투쟁이 전국 곳곳에서 연일 벌어졌다.
조선소가 있는 도시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영에 공동으로 참여하는 권리를 보장받은 노동계는 사용자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데에 열중했다. 사용자가 경영의욕을 상실하는 것은 물론 노동자의 생산성과 독일인 특유의 근면성도 하루가 다르게 약화되었다. 조선 산업의 경쟁력이 눈에 띄게 허약해지더니 결국 쇠퇴의 구렁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아무리 앞서가는 공업대국이라도 후진국의 도전을 극복할 능력과 경쟁력을 상실하면 반석 같은 자리와 화려했던 영광을 내줘야 하는 것이 세계경제질서의 엄연한 현실이다. 하지만 유럽에서 독일의 조선 산업만큼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영역이라고 믿었기에 좌절감과 실망감은 더욱 컸다. 공업후진국 한국이 독일의 잠수함 만드는 기술까지도 물려받을 만큼 성장해서 조선대국으로 우뚝 선 모습을 바라보는 독일 사람들의 심정은 매우 착잡하고 허탈하다고 한다.
우리도 조금만 방심하면 한국을 바라보는 독일 사람들과 같은 착잡하고 허탈한 심정을 가질지도 모른다.
조선 산업에 대한 80%의 경제의존도는 분명히 거제에 풍요를 보장해 줄 수도 있는 반면에 거제를 절망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거제시민과 조선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당장 눈앞에 화려하게 펼쳐지는 통계수치나 경제지표 그리고 당장 누리는 물질적 풍요로움에 현혹되지 말고 독일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철학과 각오로 단단히 무장해야 한다.
언론매체의 지면과 화면에 잠시 각광을 받다가 시들해지는 그런 거제가 아니고 앞으로도 「30만」 「300억」 「최고」 「제일」과 같은 수식어가 계속해서 붙는 거제가 되어야 한다. 좋은 징조의 하나로 다행히 수년 동안 거제의 조선업계는 심각한 노사갈등을 보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일등 시민과 일등 도시를 지향하겠다는 다짐으로 큰 미래를 위해 작은 현실적 만족을 양보하고 희생하는 미덕을 쌓는 건전한 근로자 정신과 성숙한 시민정신이 작용하는 것 같다. 이것 역시 축하받고 칭찬받고 자랑할 만한 일임에 틀림없다.
전의승 skj633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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