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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향기이순애 /예인유치원 원장

여행을 떠난다. 겨울을 만나고 싶다. 홀로 흔들리고 홀로 성숙하고 싶다. 나에게 질문하고 확인 받고 싶다. 떠난다는 것. 뒤돌아보면서 걷지 않아도 나를 만날 수 있는 곳. 누구도 쉽게 내딛지 않는 겨울 섬으로 떠나고 싶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섬을 동경하면서 수많은 상상이 꼬리를 물었던 불면의 시간이 떠오른다.

마음 깊숙한 곳에다 간직한 내밀한 방명록을 꺼내들었다. 방명록에다 수없이 기록하고 지운 사연을, 꿈들을, 청순을 끄집어내어 다시 기록하고 흔적을 남기고 싶다. 나 여기 있고, 그곳에 섬이 있다. 그리운 사람들, 인연이 남긴 흐릿해진 기억들이 일순간 선명해진다. 가끔 내가 떠난 섬에서 섬처럼 고립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조건을 달지 않고 떠난다. 이 섬 어디에서든지 생채기 같은 흔적을 남기고 싶다. 목적이 없어도 닿을 수 있는 여행이 진정한 자유인 아닌가.

한파가 몰아쳐 세상은 꽁꽁 얼어붙었다. 칼날 같은 추위에 몸이 얼어붙는다. 먼 산 위에는 하얀 눈이 얹혔다. 함박눈이 펑펑 퍼붓고 세상의 지순한 길들을 지우는 그 무엇의 환상이 마음속에서 뱅뱅거린다. 신비로움으로 가득 채우진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오늘은 오늘의 여행이고 내일은 오늘의 여행이 만들어진 축복이기를.

겨울 여행은 삶이 충만해지는 쉼표이다. 신비로움이 밀려오는 떨림이다. 새로운 시작의 모멘텀이고 나를 위로하는 선물이다. 감색 모임의 회원들과 2박 3일 여정으로 청산도 트레킹을 떠났다. 들뜬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마주 보는 회원들의 눈빛에 묻어난 미소는 넉넉했고, 떠나기 전날 밤은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청산도 섬이 어른거렸고 생각은 생각을 입히면서 길을 만들었다.

따뜻한 겨울 모자를 챙기고, 조깅화도 챙겼다. 두꺼운 양말과 털장갑뿐 아니라 대책 없는 마음까지도 주섬주섬 배낭 속에 챙겨 넣었다. 출렁이는 마음이 몰려오다 보니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기로 몇 번이나 작심했다. 여행 계획을 수립하고 물건을 챙기고 지도를 검색할 때마다 스스로 허물어지는 깊은 갈증은 심층 아래의 용암처럼 뜨겁게 흘러내렸다. 생이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무기력해진다. 내가 나 자신이 싫어질 때마다 오싹한 한기가 몰려왔던 기억은 불안을 동반했다. 먼 훗날을 기약할 때마다 지금의 나 자신이 초라했다.

금요일 오후 늦게 도착한 완도 여객터미널은 적막을 깔고 있었다. 노을 진 석양에 앉은 바다는 고요했고 거친 파도에 몸을 맡긴 포구의 배들은 심하게 일렁거렸다. 희미한 가로등에 노출된 거리의 상점들은 한산했다. 여름 성수기 때는 뜨거운 열기로 북적거렸을 여객터미널이 비수기를 맞은 셈이다.

나는 홀로 출렁이고, 고립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겨울 여행을 즐긴다. 완도에서 청산도 까지는 1시간쯤 소요되었다. 넓은 객실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운다. 어느새 여행길에 오르기까지 분주했던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여유를 찾는다. 온기로 데워진 객실 바닥에 등을 맞대고 누웠다. 추위로 팽팽해진 근육이 이완되어 제자리를 찾는다. 어느새 노을 진 청산도 바다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눈을 뜨고 바라본 하늘의 별들은 앞 다투어 바다에 쪼르르 앉았다. 산봉우리에는 달빛이 걸쳤고 어둠의 바다는 파도가 풀어놓은 별빛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네비게이션으로 검색한 식당은 꽤 먼 곳에 있었다. 삼겹살과 소주를 곁들인 반주는 찌릿했다. 여독이 풀리고 긴장이 이완되는지 나른해지는 몸 기운이 전신을 휘감았다.

저녁 만찬을 즐기고 오르막 언덕배기에 터를 잡은 숙소에다 여장을 풀었다. 창틀사이로 찬 공기가 툭툭 때린다.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붉은 빛과 어둠이 교차했다. 그곳에는 섬이 없으니 천상의 하늘이야말로 외로움이 남긴 그림자가 없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조깅으로 새벽을 열었다. 진눈개비가 내린 비탈진 언덕길이 미끄러웠다. 산속에 기댄 마을을 돌아 목섬까지 바닷길을 쉼 없이 달렸다. 옷깃 사이로 스며들던 한기는 어느새 땀방울이 되어 온몸이 뜨거운 열기로 데워졌다. 심신이 고단했던 일상들과 짓눌린 삶의 무게는 새벽 공기 속으로 사라져갔다. 몸에서 팔딱이던 세포도 더는 늘어지지 않고 봄날의 죽순처럼 심장을 깨우고 있었다.

아침 바다는 어머니 품처럼 편안했다. 오리가족은 파도타기를 즐기고 있다. 평화롭고 한가롭고 정감이 묻어 있다. 몇 번이나 무언의 말로 ‘안녕’이라 인사하면서 친근감을 표시했고 뜨거운 입김이 닿은 손을 흔들었다. 여름날 관광객들로 시끌벅적 요란했을 여름 풍광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곳곳에 솟아오른 크고 작은 섬 봉우들은 파도가 말벗이 되고, 파도는 넘실대는 물결에 무등을 태워주고 있다. 자그락거리는 몽돌은 서로에게 등을 내어 주었다.

어떤 위로를 주고받는지, 상처의 흔적을 어떻게 지워주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바다에서 경이로운 화음을 만들었다. 섬마을 아주머니들은 햇살이 비춘 갯벌에 엎드려 저녁 밥상에 올려놓을 찬거리를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코끝에 스며드는 상큼한 바다 내음이 향기롭게 퍼진다. 그러다 해가 저물고 들 물이 밀려오면 바다는 거칠게 요동칠 것이다.

두 밤을 자고 나니 청산도 작은 섬은 내가 살고 싶은 섬이 되었다. 이른 아침 눈을 뜨면 새소리가 지저귀고 한걸음 나아가면 바닷길이 열리는 세상은 내가 꿈꾸는 노년의 마을이다.

2박 3일의 섬 여행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여행인가! 돌아오는 일상의 발걸음은 또다시 나를 재촉한다. 밝아오는 24년을 향해서. 청산도에 손 흔들고 석별의 정을 나눈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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