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창을 경계로 안팎 분위기가 판이하다. 창밖은 향기로운 녹음방초가 청년의 기상을 풍기는 데. 창안은 강 하류에 만들어진 모래섬처럼 쓸쓸하고 황막하다. 이런 환경에서 노인환자들은 개인에 주어진 영역, 침대에 누워 줄곧 잔다. 그러다가 일어나 음식을 먹고, 멍하게 앉았다가, 다시 눕고, 그러다가 다시 일어나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세탁물, 화장실·입원실·휴지통, 습한 물성이 서로 들러붙어 시지근한 냄새를 풍기는, 그 기류 속에 노모가 있다.

나는 병실에 들어서면 첫밗에 부러 무표정을 짓는다. 현재 상태를 테스트하기 위해서다. 엄마가 나를 보자마자 앞면 근육을 실룩이기 시작하면 일단 안심해도 된다. 딸을 알아봤으니, 인지기억장애가 경증에서 악화되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이번에도 엄마는‘인자 오나’하며 울상을 짓는다. 들고 간 생화 분(盆)을 보고 반색을 하는 데, 직원이 생화는 반입금지라고 펄쩍 뛴다. 꽃 한 송이 둘 수 없는 공간에서 과거를, 현재와 미래를 유실하고 있는 엄마, 이제 다리 근육마저 다 잃어 보행이 불가능해졌다.

엄마를 휠체어에 앉혀 테라스로 나온다. 화초들이 날비린내를 내뿜으며 폭풍성장 중이다. 밥 보다 꽃을 좋아했던 엄마, 만개한 제철 꽃들 앞에서 절로 웃음꽃이 핀다. 노모는 내가 가리키는 화초를 일일이 호명한다.‘개망초’‘채송화’‘돈나물’,‘베고니아’, 거의가 정답이다. 며칠 전에 문병 온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꽃 이름을 잘도 외우는 아이러니라니...
한 중년 남자가 힐체어를 밀고 나타난다. 그의 모친 같다. 아들은 폰으로 노래를 켜서 노인의 귀에 대준다. 울 엄마 애창곡‘목포의 눈물’이다. 노인은 마네킹처럼 미동도 말도 없다. 사색(死色)의 노인은 잃어버린 언어의 외곽너머에서 일체의 감정을 놓아버린 모습이다. 엄마 보다 증세가 심각해 보인다.
나는 양해를 구해 노래를 라이브로 듣자고 제의를 한다. 노인의 손녀 딸 둘이 박수로 분위기를 띄워준다.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노래를 한다.‘사공에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몸이 기억하는 가사가 조금 변질되었어도 가창력은 살아있다. 내 귀엔 ’젊음도 과거도 가물거리면...‘ 으로 들린 노랫말이 생선 가시처럼 목에 걸린다. 가슴이 막혀 답답하다. 그 아들도 노모의 무릎팎에 머리를 묻고 훌쩍거린다.

병실 동거인들은 대개 증세가 비슷하다. 손수 입고 먹고 씻고 할 수 없다. 간병인에 의지하여 24시간을 버티는 7,80대(歲) 여인들, 그러나 때론 드센 아집을 보이곤 한다.‘미스고 할매’는 옆에서 그만하라고 핀잔을 줘도‘미스고’를 부르고 또 부른다. 왕년에 노래실력 짱이었다고 보호자가 귀띔을 해준다.‘버럭 할매’도 예외가 아니다. 수틀리면 화(怒)를 내는데, 나에게도 가져간 걸 내 놓으라고 언성을 높인다. 엄마 옆 침대 노인도 기억의 실타래를 풀었다 감았다를 반복하는데,‘전직교사’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엄마는 꽃가꾸기, 글 읽기, 메모하기가 취미였는데...
엄마의 집은 잡동사니로 꽉 차 있었다. 물건을 버리지는 못하고 모으기만 했으니 그럴 수밖에. 언젠가 친정에 가 노모 곁에서 잘 때였다. 한밤에 눈을 뜨니 엄마가 안 보였다. 수십 년 모은 짐 속에 들어앉아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내가 몰래 갖다 버린 물건의 행방을 밤새 추적한 것이다. 할 수 없이 폐기물 저장고에서 그걸 가져다 원상복귀 해놓으며 나는‘이해할 수 없다’고 앙살을 부렸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 후에야 이유를 알았다. 어떤 물건이든지 사용 여부에 관계없이 계속 저장하는 증상은 일명 ‘저장강박증’이라고. 성격 탓이 아닌, 환경이나 마음에서 기인한 병이었다. 우울감, 불안감, 외로움, 스트레스, 억압 등이 장기간 이어져 의사결정 능력이나 행동 계획과 관련된 뇌의 전두엽 부위 기능에 이상이 생긴 것. 원인을 모르고 핀잔만 한 셈이다.

엄마는 이제 모든 걸 놓아 버렸다. 수십 개의 화분, 홍보관 건강식품, 불경 새겨진 항아리, 조화, 자식들 키울 때 사용하던 물건까지 껴안고 살았는데,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잊어(잃어) 버렸다. 병실 노인들은 외모, 연령, 학력, 재산이 평준화 되었다. 서글픈 공존의 장소에서 명멸하는 의식을 붙잡은 채 기신기신 어둠 속으로 소멸하고 있다. 협동 단결한 듯 그렇게들 한 길을 향해 진행 중이다.

그 팩트는 나에게 경전과 성경보다 분명한 깨달음이다. 거울 속의 자신도 몰라보는, 안타까운 장면에서 나는 당장 실천할 일을 정했다. 기억을 놓은 후‘본의 아니게 정리되기’보다 말짱한 정신일 때‘본의로 정리하기’다. 그러고 보니 집안에 쟁여놓은 것이 적지 않다. 반면교사 엄마 덕에 나름 자주 버렸는데도 정리할 물건이 아직도 많다. 옷, 그릇, 가구, 책, 사진, 상장... ‘소유물 중 실제 사용하는 것은 20%에 불과하다. 그 80%를 덜어내야 건강에 좋다’는 8대 2법칙과‘아끼면 똥 된다’는 말에 절대 공감이다.

관점을 달리하면 안 보이는 게 보이는 법, 마음속에 붙들고 있는 것도 정리하고 싶다. 젊음에 대한 향수, 못다 이룬 목표, 자녀에 대한 집착, 이런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일이다. 해질녘에 꽃향기 피우려면...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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