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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의 재발견 - 거제의 다크투어리즘 (Dark tourism) 4④섬으로 쫓겨난 사람들
조선시대 행정 중심지 이동에 따라 고현지역과 거제면 지역으로 유배지가 옮겨 갔으며, 거제 7 진영(조라, 지세포에 유배 온 기록)에 나누어 배치되기도 했다.

거제는 선사시대부터 근현대 유적이 시대별로 빠짐없이 남아있는 전국에도 유래가 드문 역사의 고장이다.

긴 세월 외침에 자유롭지 못한 탓에 시대별 다양한 성이 20여 개 넘게 만들어진 성의 박물관인 거제는 영광의 역사만큼 그 이면에 어두운 역사가 공존하고 있다.

아파서 지우고 싶은 상처지만 분명 의미가 깊은 곳인 만큼 다시 되새겨 봐야 하는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에 가장 적합한 도시다.

최근 다크투어리즘이 국내외의 관광산업을 바꾸고 있다. 9·11 테러가 발생했던 세계무역센터 붕괴지점인 미국의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를 비롯해, 아우슈비츠 수용소(폴란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발전소, 중국의 731부대, 우리나라의 경우엔 제주 4·3 평화공원, 분단 상징인 비무장지대(DMZ),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등이 그렇다.

하지만 거제지역의 경우 수많은 다크투어리즘 장소를 보유하고도 스토리텔링으로 재구성하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구체적인 전략 수립이 부족한 실정이다.

본지는 거제지역 곳곳에 아픈 역사로 남아 있는 아픈 역사의 흔적을 찾아 다크투어리즘의 가능성을 재고하고 4회에 걸쳐 소개한다.

거제로 유배 오기 위해 수많은 유배 죄인들이 견내량을 건넜다.

섬으로 쫓겨난 사람들

고대서부터 해상교통의 요지로 우리나라 남부 해안 지역과 제주도 대마도 이끼섬 규슈 등과 왕래하며 교역에 의존해 살아온 거제는 변방의 역사 그 자체다.

그리고 그 변방이라는 이름 아래 시대별 역사적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유배와 유폐 그리고 세상과 담을 쌓기 위해 거제 땅을 밟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역사를 바탕으로 볼 때 거제지역이 유배지로 기록된 것은 고려 때부터다. 거제는 개성이나 한양 등 당시 행정중심지에서 가장 멀리 있는 역(驛)인 오량역이 있었던 탓이다.

거제에 최초로 유배를 왔던 인물은 기록상 고려 문종의 아들 승통 탱이다. 이후 1126년 이자겸의 난으로 그의 아들 이지언이 가솔들과 함께 거제로 유배 왔다. 현재 거제시지를 비롯해 거제지역 향토사엔 둔덕면 지역에 기록에 없는 이의민 일가가 둔덕면지역에 유배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이지언의 유배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1157년(의종 11년)에 거제도로 유배 온 정서(鄭敍) 정사문(鄭嗣文)도 거제지역에 유배 온 대표적 인물이다. 동래에서 거제로 이배 된 정서는 거제에서 13년 귀양살이를 하며 우리나라 ‘유배문학’의 효시인 정과정(鄭瓜亭)곡’을 지었다.(둔덕기성 아래엔 정과정곡 시비가 놓여있다.)

오량역은 고려시대 거제지역 대표적인 유배 죄인들의 배소지로 특히 유배문학의 효시인 정과정곡을 지은 정서 선생이 오랫동안 머물렀다.

무신정변으로 거제에 유폐된 의종의 경우 1173년 계사년(癸巳年)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보당(金甫當)이 의종의 복위(復位)를 위해 경주에서 반무신난(反武臣亂)을 일으키기 위해 데려갈 때까지 3년 동안 둔덕면 지역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둔덕면민들은 800년 넘게 의종의 추념제를 지내고 있다. 의종의 거제 유폐를 유배로 보는 견해는 사실상 정치적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난 의종의 당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고려사에서 의종의 기록은 전왕(前王), 양위(讓位)라는 기록은 있지만 폐위(廢位)나 귀양(歸養)이라는 기록이 없다. 고려 최자(崔滋)가 엮은 시화집(詩話集)인 보한집에선 ‘피난(避難)’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둔덕 주민들은 의종이 피난 온 것으로 전해 들었다고 한다.

이후 조선 건국과 함께 거제도와 강화도 등으로 쫓겨난 고려의 수많은 왕족(왕 씨)들은 조선 건국과 함께 거제로 유배 왔다가 1394년(태조 3년) 손흥종(孫興宗) 등에 의해 거제 바다에 던져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선 거제지역은 제주도 다음으로 유명한 유배지가 됐다. 조선왕조실록 유배 기사 5860여 건 중 제주도가 81회로 가장 많고 이어 거제도가 그다음 많은 80회다.

그러나 문헌상 명단이 확인되는 유배자는 거제도가 500여 명으로 300명 정도의 제주도보다 많다.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거제유배의 역사는 100여 년 전까지 이어졌다. 거제지역 내 배소지는 고려 초부터 조선 초까지 견내량 오양역 부근과 사등면 둔덕면 지역, 그리고 일부는 가라산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거제도 유배는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 1504년의 갑자사화, 1519년(중종 14)의 기묘사화, 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 등 각종 사화와 역모 등 중대 사건과 연루된 사람들이다.

거제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유배된 사람은 일제 초기 조성환(曺成煥, 1875년∼1948년, 독립운동가)으로 1912년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桂太郞) 암살 미수로 체포돼 거제도에 1년간 유형(流刑)된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거제유배의 역사는 100여 년 전까지 이어졌다. 거제지역 내 배소지는 고려 초부터 조선 초까지 견내량 오양역 부근과 사등면 둔덕면 지역, 그리고 일부는 가라산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거제면 외간 지역도 유배인들의 배소지 중 하나다. 사진은 외간 동백나무

이후 조선시대 행정 중심지 이동에 따라 고현지역과 거제면 지역으로 배소지가 옮겨 갔으며, 거제 7 진영(조라, 지세포에 유배 온 기록)에 나누어 배치되기도 했다.

거제로 유배 온 유배객들은 정확하게 몇 명인지 알 수 없지만 이들은 유배 온 거제 땅에서 , 자신의 신세와 임금에 대한 충정,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거제주민의 실상과 풍경을 노래한 기록을 남겨 현재까지 고영화 고전문학 연구가가 거제지역에서 발굴한 유배문학만 1400여 편이 넘는다.

유배는 한 때 거제의 치욕적인 역사로 인식됐지만, 유배라는 단어 자체가 고전이 돼 버린 지금은 역사와 문학을 공부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남았다.

조선시대 초와 중기엔 고현지역이 유배 죄인들의 배소지로 지정 받았는데, 자신의 신세와 임금에 대한 충정,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거제주민의 실상과 풍경을 기록으로 남겼다.

무신정변으로 쫓겨 온 의종도 둔덕면 지역에 수많은 지명과 전설 남겼다. 그러나 고려촌 사업은 권민호 전 시장 때부터 10년 넘게 제자리걸음 상태며, 유배문학관은 경제적 논리에 막혀 시도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세상과 담을 쌓기 위해 거제 땅을 밟았던 인물도 있다. 스승이었던 정몽주가 조선 개국 직전 개성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거제도로 와 몸을 숨기고 망국의 한을 품으며 ‘두문불출’한 옥사온(玉斯溫)이다.

산방산 옥굴의 실제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이 인물의 이야기는 다음호에 게재할 계획이다.

거제지역에서 발굴한 유배문학만 1400여 편이 넘는다.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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