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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의 재발견 - 견내량 (見乃梁)전군 견내량으로 집결하라 - 조선 첫 해외 원정 대마도 정벌, 거제 제1관문 전하도ㆍ 견내량ㆍ거제대교
견내량의 석양

조선 첫 해외 원정 대마도 정벌

세종 1년(1419년) 5월 14일 상왕(태종)은 전군에 비상 소집령을 내려 조선 수군의 주력군을 거제 ‘견내량’에 집결시키라 명한다.

이종무(李從茂)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영의정 유정현을 삼도 도통사(三道都統使)로, 의정부 참찬 최윤덕을 삼군 도절제사(三軍都節制使)로 명하고, 우박(禹博), 이숙묘(李叔畝), 황상(黃象)을 중군 절제사, 유습(柳濕)을 좌군 도절제사, 박초(朴礎)와 박실(朴實)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실(李之實)을 우군 도절제사로, 김을화와 이순몽(李順蒙)을 우군 절제사로 삼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3도에 있는 병선 227척과 병사 1만 7000명 등 조선의 군사력이 투입된 최초의 해외 원정이었던 대마도 정벌의 서막이다.

비변사인방지도엔 견내량진에 대한 설명이 있다.

대마도는 예부터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 해협에 위치해 중개무역으로 경제를 이어갔다. 토지가 협소하고 척박했던 대마도는 식량 대부분을 외부에서 들려와야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공(朝貢)을 받는 대가로 미곡(米穀)을 받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대마도의 왜구들은 기근이 심할 때면 해적으로 변해 우리나라 해안을 약탈했고, 조선 조정은 그 근원을 제거하기 위해 ‘대마도 정벌’이란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많은 사람들이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만 기억하고 있지만, 사실 대마도 정벌은 1389년(공양왕 1년) 2월에 박위가 병선 100척을 이끌고 대마도를 공격해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고려 백성 100여 명을 찾아온 것이 시초다.

두 째는 1396년(태조 5) 12월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이 오도병마처치사(五道兵馬處置使)로 임명돼 대마도를 정벌한 일이고 세 째가 1419년(세종 1) 6월에 견내량을 출발한 대마도 정벌이다.

세종 1년 6월 17일 이종무는 견내량를 떠나 출정했지만, 기강 상태가 좋지 못해 이틀 뒤인 6월 19일 사시(巳時:오전 9시∼11시)가 돼서야 거제도 남쪽 주원 방포(周原防浦-한산도 추봉리 추원포)에서 대마도 정벌을 위한 닻을 올린다.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군은 세종 1년 6월 20일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에 대마도 두지포(아소만 인근)에 도착했다.

병선 227척(경기도 10척, 충청도 32척, 전라도 50척, 경상도 126척)에 1만 7285명의 군사와 65일 치의 군량미를 실은 대마도 정벌군은 6월 20일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에 대마도 두지포(아소만 인근)에 도착했다.

정벌군은 가옥 1,939호를 불태우고 왜구 114명을 사살, 21명을 생포했다. 그리고 중국인 포로 130명을 구출하는 성과를 올렸지만 산에 숨어든 대마도의 잔여 왜구를 공격했다가 180명의 사상자를 내며 썩 좋지 못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대마도는 조선에 항복을 청했고 조선은 대마도 정벌 후 100여 년간 왜구 침입이 없는 태평성대를 누렸다.

거제 입장에선 고려 원종 12년(1271년) 거창현, 영선현 등으로 피난을 떠났던 거제도민들이 151년 만에 고향인 거제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견내량에서 썰물을 타면 힘들이지 않고 큰 바다로 나갈 수 있고, 또 큰 바다에서 다시 쿠로시오 해류를 타면 단숨에 대마도로 접근할 수 있다.

거제 제1관문 전하도ㆍ견내량ㆍ거제대교

거제와 통영의 경계기도 한 견내량 해협은 예부터 거제 제1관문 역할을 하며 수많은 역사를 담아냈던 곳이다.

견내량 마을 인근에는 1950년대까지 청동기 시대 유적인 지석묘(고인돌)가 군락을 이뤘고 그 주변 밭에선 석부, 석검, 후육무문토기 등 다양한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미뤄 일찍부터 육지에서 넘어 온 사람들의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견내량은 사람마다 부르는 지명도 다양하다. 1170년 고려 의종이 무신정변에 의해 거제도로 피난 오면서 통구미배로 해협을 건넜다고 해서 전하도(殿下渡)라 부르기도 하지만 예부터 나루터라는 뜻의 진두(津頭)로 불렸다고 한다.

‘견내량’ 이라는 명칭은 태조 4년(1395년) 3월 9일 ‘경상도 견내량(見乃梁) 수군만호 차준(車俊)이 왜적의 배 2척을 잡았다’는 기록부터 시작된다.

견내량에서 통영까지 가장 가까운 곳은 500미터 남짓으로 해협 사이가 좁아 조류가 병목 현상을 일으켜 물살이 급하다. 때문에 견내량에서 생산되는 미역은 품질이 좋았고 조선시대 임금의 진상품 이었다고 전한다.

대마도 정벌 당시 조선 수군이 좁고 물살이 거센 견내량에 굳이 집결한 이유는 하루에 두 번 식 방향을 바꾸는 조류 때문이었다.

견내량 해협은 육지와 500미터 남짓 거리로 조류가 병목 현상을 일으켜 물살이 급하다.

견내량에서 썰물을 타면 힘들이지 않고 큰 바다로 나갈 수 있고, 또 큰 바다에서 다시 쿠로시오 해류를 타면 단숨에 대마도로 접근할 수 있다.

더구나 견내량은 거제도 본섬을 품고 있어 대마도나 먼 바다에서는 보이지 않는 위치였기 때문에 대마도 원정을 위한 전초기지로 최적의 장소였다.

견내량 뒷산 시리봉 자락엔 임진왜란 전부터 이항복이 견내량의 군사적 중요성을 알고 관방(關防)을 설치했고, 동북쪽에 위치한 오량역(오량성)은 예부터 거제에 발령받은 관리들 및 유배인들이 꼭 지나쳐야 했던 관문이었다.

견내량 마을 표지석 =견내량 역사를 간략히 설명해 놨다.

견내량엔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무이루’라는 정자가 있었다. 무이루는 적을 사로잡아 교화, 또는 적을 다독여 보낸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으로, 조선시대 김종직을 비롯한 많은 관리와 선비들이 이 정자를 찾았고, 또 칭송하는 글을 남겼다.

현재 견내량은 사람들 사이에서 ‘대교’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통한다. 1971년 4월에 개통된 구(舊)거제대교가 만들어지면서 굳혀진 지명이다. 더구나 1999년 7월 신(新)거제대교까지 개통되면서 ‘대교’라는 지명은 어느새 견내량 지역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해 있다.

지난 2010년 거제와 부산을 잇는 거가대교의 개통에도 견내량은 여전히 육지와 거제도를 잇는 ‘대교’로, 또 ‘거제 제1관문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참고자료 = 사등면사, 조선왕조실록

견내량에서 출정한 대마도 정벌군은 가옥 대마도에 도착해 1939호를 불태우고 왜구 114명을 사살, 21명을 생포했다.
1872년 지방도엔 견내량과 인근의 오량역, 광리왜성 및 영등진(둔덕면 학산지역)을 볼 수 있다.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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