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종교칼럼
기독교의 핵심, 부활신앙김한식 /호산나교회 담임목사

요즘 우리들의 삶이 너무 팍팍하다.
사업체는 계속해서 문을 닫아가고, 해고자의 숫자는 늘어가며, 시내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지어놓은 원룸은 태반이 비어있고, 고급 아파트는 계속해서 하한가로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지만 찾는 이가 잘 보이질 않는다. 경제적인 삶이 이렇게 팍팍하다보니 인간관계들도 이전처럼 활발하지 않고 다들 몸을 사리고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이런 어려운 형편 속에서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보지만 가시적인 하나님의 손길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다들 더욱 힘들어 한다.

여러분의 일상은 어떠한가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흡족하게 도와주고 계신가요? 아니면 욥의 고백처럼 좌에 계신가하여 돌아보면 거기에도 안 계시고, 우에 계신가 하여 그리로 돌아보아도 거기도 계시지 않는 무관심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멀고도 먼 절대타자로 인식이 되고 있지는 않나요? 솔직히 대부분의 경우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잘 실감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원망과 불평과 고통의 아리아를 매일같이 부르고 있다. 고통과 불편함과 불안함, 그리고 거기에서 격발이 되는 원망과 섭섭함과 미움 등은 사실 모두가 다 ‘희망 없음’ 혹은 ‘절망’에서 기인한다.

우리가 잘 아는 고장 난 냉동차에서 얼어 죽은 시베리아의 화물회사 직원의 이야기가 바로 그 절망의 파워에 대한 적절한 예가 아닌가 생각한다. 어느 날 시베리아의 화물회사 직원이 고장이 난 냉동차 안에서 짐을 풀고 있었다.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 마지막 짐을 풀려고 하는데 그만 그 냉동차의 문이 철컥하고 잠겨버렸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안에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 사내는 냉동차 안에서 소리를 지르며 구조를 요청했지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고 열차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출발을 해버렸다.

그 사내는 자신이 다음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분명히 그 차가운 냉동차 안에서 얼어 죽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추위가 몰아 닥쳤다. 그 사람이 자신의 현실에 대해 절망을 하자 그 절망이 현실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 분별력을 파괴해 버린 것이다. 사실 그때는 봄이었다. 그리고 냉동차는 고장이 난 상태였다. 그러한 기온에서는 절대 사람이 얼어 죽을 수가 없다. 그런데 열차가 달리면서 문틈으로 바람이 조금씩 새어 들어오자 그 봄바람이 절망 속에 있는 사내에게는 냉동차의 추위로 인식이 되었다.

그 사내는 결국 자신의 절망적 상황을 냉동차 벽에 낙서처럼 남기고 다음 정류장에서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이 되었다. 절망은 그런 것이다. 희망 없음이라는 것은 존재의 힘을 빼는 것은 물론이고 목숨까지도 갉아먹는 무서운 힘이 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의 정체를 ‘절망’이라 이름 했다. 그렇게 절망은 우리를 우울하게 하고 외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심지어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 분을 향해 불만의 독화살을 쏘게 할 수 있는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아담 안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이 다 절망 속에서 태어나서 절망 속에서 살다가 절망 속에서 죽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성경은 우리 성도들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아니 성도에게는 희망 정도가 아니라 번복될 수 없고 확정된 희망 즉 소망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씀한다. 소망은 희망사항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희망은 언제든지 번복될 수 있고 실패될 수도 있으며 파괴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소망은 확정된 희망으로서 절대로 실패될 수 없고 번복될 수도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소망을 가진 성도는 절대 절망이 주는 쓴 잔을 들고 독설과 원망의 아리아를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도들에게서 그렇게 자주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의 아리아가 나오고 있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것은 우리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성도가 가져야 하는 소망의 정체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도가 절망의 현실 속에서 그 현실을 밟고 일어설 수 있는 소망의 정체가 무엇인가? 무엇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힘을 부여해서 이 절망의 현실을 극복하고 희망찬 내일을 바라보면서 힘차게 달려갈 수 있게 하는 힘의 원동력이 무엇일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글에서 성경은 성도가 이 땅에서 소망으로 갖고 있어야 할 것을 한 마디로 축약하여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다시 말하면 성도의 소망은 부활이다. 만일 이 세상의 삶이 끝이라면 성도가 이 땅에서 겪는 고난과 시험 등은 성도를 우울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며 죽고 싶게 만들어야 맞다.

그런데 이 땅의 삶이 끝이 아니라 이 땅의 삶과는 비교도 할 수없는 영원한 삶이 존재하며, 그 영원 속에서 살 수 있는 신령한 몸이 성도에게 새로 주어지게 된다는 부활신앙이 성도에게 있는 한 성도는 이 땅의 어둡고 암담한 현실 속에서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이생의 현실로 모든 게 끝이 난다면 그렇게 고난과 수고를 감수하며 사는 성도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이들이 맞다. 이생이 끝인데 왜 참고 살아야 하고, 왜 당하고 살아야 하며, 왜 용서해야 하는가?

그러나 성도들에겐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 영원을 살게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예비 되어 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과 육신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배우고, 훈련하며, 실습하는 장(場)일뿐이다. 비록 현실이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다시 오실 주님을 생각하고 부활의 그날을 생각하면서 어려운 현실을 이겨내시길 기원한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저작권자 © 새거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새거제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