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달력도 마지막 한 장만 남았다. 시간을 모눈종이처럼 쪼개어 빈틈없이 살리라던 다짐도 허공으로 날아갔고, 여느 해와 별반 다름없는 한 해가 되어버렸다. 금년은 다른 해와 다르게 내겐 커다란 의미로 다가왔지만, 지나고 보니 그게 그거다. 골짝에 잦아드는 저녁연기를 바라보며 마음을 잡아본다. 그래도 남은 한 달이 있지 않은가.

어찌 한 해를 보냈건 나머지 시간이라도 갈무리 잘 하는 일상을 생각해 본다. 지난 시간에 너무 묶이지 말고,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을 정월 초하룻날 아침처럼 나 자신을 출발선에 올려놓고 싶다. 나머지 한 달을 모눈종이처럼 쪼개어 쓰면 일 년으로도 살 수 있지 않을까. 한 달이란 기간은 세상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12월을 마무리하는 달이라기보다는 부족함을 채우고, 새로운 도전을 계획하는 기간이라고 인식하고 싶다. 지난 세월의 무능을 다시 이어가지 않기 위해 새로운 나를 만드는 기간이라 생각하면 된다.

먼저 자신을 추슬러 본다. 그동안의 삶이 최선이었는가. 밖으로는 너그럽고, 안으로는 강하게 자신을 지탱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형평의 저울에서 균형을 잡지 못한 삶이었다. 돌이켜 보면 너무 안으로만 강하게 제어했고, 밖으로는 사랑을 베풀지 못한 부끄러운 모습뿐이다. 문을 열기는커녕 닫기에 급급하였고, 강약 조절에도 실패한 세월이었다. 좀 더 균형된 삶을 꾸릴 수도 있었는데, 부글거리며 일어서는 감정의 노예가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직도 젊은 탓인가.

나이 들어 이제는 그 감정을 어르고 달래는 데에도 이골이 났을 법한데, 지나고 보면 그것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얼치기였다. 감정을 슬기롭게 덮지 못하고 순진하게 그 뿌리를 찾아 뽑으려했던 미련이 자꾸만 수치스럽게 고개를 든다. 그냥 세상을 읽으면서 덮고, 읽으면서 조용히 처신이나 했으면 될 것을, 굳이 근원을 찾아 병균이나 박멸하듯 설쳤으니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민망스러운 꼴이었을까. 자연에게도 그렇다. 늘 자연의 혜택을 보면서도 그 자연이 주는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한 아둔한 사람이었다. 초록의 일어섬을 보면서도 제 희망을 키우지 못했고, 신록의 최선을 바라보면서도 게으름에 빠졌으며, 한 덩어리가 되어 통합하는 단풍을 바라보면서도 이웃과 어울리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익으면 고개 숙여야 하는 벼이삭의 겸손도 배울 줄 모르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제 눈에 든 기둥은 모르고, 남의 눈에 든 티끌만 바라보았으니, 후회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12월의 문턱에서 후회스런 지난 세월의 아둔함을 인정한다.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인간의 무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본다. 지난 삶을 모두 추스를 수는 없고, 몇 가지만이라도 챙겨야 하리라. 최소한 사람 인(人)임을 유지하고 사는 존재라면 제 몸이 말라 비틀어져 사람 냄새조차도 풍기지 못하는 몰골에 감정을 불어넣어야 한다. 마음이 바윗돌 같이 메말라서 인정의 비가 내린다 해도 고이지 못하고 주르르 흘러내리는 자신에게 우선 정(情)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리하여 늘 잔잔한 인정이 흐르는 샘터로 만들어야 한다. 누구나 함께 할 수 있고, 누구나 부담 없이 교유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이다. 얼마 전 함께 함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던 저 단풍의 모습처럼 우리도 그래야 삶이 더 윤택하고 아름답다. 아직도 이리 옹색한 몰골이니, 얼마의 세월이 흘러야 자연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생각하고 사유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모든 동물들은 지난 삶을 꼬리로 쓸어 지우며 살아가지만, 인간은 그럴 꼬리가 없다. 신이 모든 동물들에게 꼬리를 남겨 두면서도 인간에게서는 과감히 꼬리를 뽑아낸 뜻을 기억해야 한다.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그냥 덮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은 깊이 고민하여 고쳐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 12월에는 지난 삶의 우매를 이쯤에서 바라보고 다시는 그런 우매를 범하지 않도록 되돌아봐야 한다. 오늘도 부끄러움에 떨며 나 자신에게 잣대를 대어 보지만 온전한 반성보다는 자꾸만 가리기에 바쁜 마음뿐이니 사람 노릇하기에는 아직도 먼 것 같다.

12월에는 마무리보다는 차분히 반성하는 달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을 반추해 보고, 새로운 삶을 계획하는 소중한 달이다. 괜한 기분에 망년이니, 송년이니 하여 자신을 감정의 노예로 만들 일은 아니다. 순간은 즐겁고 뒤돌아보면 속이 아린 후회의 12월이 되면 한 해가 후회로 가득 차게 된다. 이 소중한 12월에 음주가무로 허송할 여유는 없다. 다시 자신을 곧추세우는 지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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