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망자(亡者)의 비망록을 해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죽음을 선택하면서까지 남긴 흔적이 살아있는 권력을 정면으로 겨냥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권력의 심장부를 강타해 국가의 존립기반마저 흔들고 있어 실체적 진실을 찾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

‘성완종 리스트’의 파문을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은 그야말로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벌써 보름째 우리는 망자와의 진실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죽고, 돈이 말을 하는 세상이니, 실종된 정치임이 분명하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 속에 돈과 권력의 함수관계만 여실히 드러나는 형국이다. 돈맛도 권력 맛도 모르고 살던 우리는 일손을 놓고 할 말을 잃은 채 구경꾼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던가. 신뢰가 땅에 떨어진 느낌이다. 아무리 억울할지라도 죽은 자는 죽음으로써 이미 끝난 게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일 날선 공방이 거듭되고 있으니, 죽은 자도 말을 하는 세상인 모양이다.
‘성완종 리스트’에 올려진 8명이 모두 여권의 실세라는 점에서 단순한 사건은 아닌 셈이다. 3천만원, 1억원, 2억원, 3억원, 7억원 등 적지 않은 돈임에도 그들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건넸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영수증도 차용증서도 있을 리가 없다. 다만 그 속에는 그들끼리의 신뢰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주고받는 관계가 정경유착의 고리임에도 ‘신뢰와 의리’라고 생각한 발상자체가 문제라는 점에서다. 정치판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람’이란 딱히 없을 것이다. 돈 세상인즉 돈줄이 바닥난 사람은 이용가치가 없다는 걸 잊었던 모양이다.
뒤늦게야 억울함을 호소하며 목숨까지 버렸지만 그렇다고 돈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되찾고 싶었던 권력(특별사면)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사람도 돈도 권력도 다 떠난 마당이니, 그가 추락한 것은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K일간지에 의하면, 그는 지난 1년간 국무총리와 217차례(실제통화 60여통), 전, 현직 비서실장과는 각각 40여 차례, 140여 차례 전화를 주고받았다. 다소 일방적일 수는 있겠지만 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는 아닌 셈이다. 지난 16년간 이어진 선물리스트(A5용지 200장)에 빠짐없이 기록된 사람들이니만큼 그만큼의 친분은 있었을 줄로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 앞에서도 그와 친분이 있었다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금품수수 의혹이 불거지자 저마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람들뿐이었다. 하기야 아직 구체적인 정황과 결정적인 단서를 제시하지 않았으니, 모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한편으론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되는 ‘신뢰’인 터라 산 자라도 살아야 한다는 논리였을 것이다. 신뢰는 모름지기 국민과 공공(公共)의 공익(公益)을 우선하는 것이어야 한다. 개인과 기업의 이익 달성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금품수수 등을 매개로 청탁은 물론이고 봐주기를 하는 따윈 ‘신뢰’가 아닌 것이다.

정치(政治)란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자신을 닦은 후 남을 돕는 것”이다. 정치가(政治家)는 먼저 자신의 부조화로운 것, 네거티브한 것을 다스려 극복한 후, 이를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그런데도 자신을 다스리기는커녕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인 양 오독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를 빙자해 개인과 기업의 이익을 우선으로 챙기는 것은 물론이다. 실소를 금할 길이 없다. 입으로만 정치하는 세상인 것이다.

이렇듯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있으니, 망자와의 진실게임도 더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 같다. 파면 팔수록 불거지는 의혹이니, 딱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여당도 야당도 모두 움츠리는 형국이다. 해외 순방 중인 대통령이 귀국하기도 전에 국무총리가 자진사퇴한 마당이니, 누구인들 온전할 리 있겠는가.
이런 와중에도 우리는 국가의 존립기반인 ‘국민’일 수밖에 없다. 국가와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우선인 것이다. 이는 ‘진실게임’이 아니라 ‘진실한 삶’을 살고 싶은 소박한 바람이기도 하다. ‘정치적(?)’이지 못해 온전하게 살 수 있었다면, 그마나 다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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