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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지방 국립 교육의 산실 - 거제향교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06호

향교는 요즘으로 말하면 공립 중ㆍ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 기관이다. 서원은 사립 중ㆍ고등학교이고, 서당이 초등학교, 그리고 성균관은 국립대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거제면 서정리엔 조선 시대 지방 국립 교육의 산실이었던 향교가 있다.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06호 거제향교가 그곳이다.

거제향교는 현재 교학 공간인 명륜당, 외삼문, 배향 공간인 대성전과 동서문, 내삼문 등이 설치돼 있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공자를 비롯한 중국 성현 4명, 신라 2명, 고려 2명 등을 모시고 매년 춘ㆍ추향제를 올리고 있다,

대성전 양옆에 있는 동무(행각)와 서무는 조선 시대 성현 16인을 모신 곳으로 같은 날 제사를 지낸다.

명륜당(明倫堂)은 유생들이 모여서 공부를 하던 강당이고, 동재는 명륜당 동쪽에 유생이 거처하며 글을 읽는 곳이었다. 풍화루(風化樓)는 백성들을 풍습에 맞춰 교육하는 곳으로 향교의 정문이다.

향교는 고려 시대부터 존재했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 지방 공교육의 산실로 자리매김했다.

조선은 개국 후 향교 등 관학을 통해 유교 교육을 강화하고, 국가의 기반을 다지려고 1읍1교(一邑一校)정책으로 각 고을마다 항교를 건립한다.

현재 거제면 서정리에 위치한 향교는 1885년(철종 6)에 다시 옮겨 지은 것이다. 거제지역에 향교가 최초로 설립된 시기는 1449년(세종 31년)으로 왜구(삼별초)를 피해 거창지역에 이주했던 거제도민이 다시 고현성을 쌓고 거제에 정착하면서 지어진 것이다.

1530년에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거제향교는 고현성 서문 1리(약400m) 서편 골짜기(서문골)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현지역에 최초로 건립된 향교는 1548년에 귀양 온 정황의 후학 양성으로 한 때 부흥기를 맞는다.

고현성을 축성한 거제현령 이호성이 1451년 가을부터 1453년까지 고현성(古縣城)을 축조하면서 관청과 객사 또 고현동 서문골에 향교를 건립했다는 사료와 일치한다.

하지만 고현성 서문 일대에 건립된 향교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고 이후 거제향교는 고현동 지역과 거제면 지역에 여러 차례 옮겨 세우게 된다.

1885년(철종 6)년 거제향교를 현재 자리에 옮겨 세우면서 만든 ‘향교이건기’에 따르면 거제향교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1664년(현종 5) 거제 동헌이 거제면으로 옮겨올 때 서정리로 함께 옮겨와 복원됐다가 52년 후인 1715년에 다시 거제의 동쪽 기슭 도륜동(道淪洞) 아래 옮겨 세우게 된다.

또 75년이 지난, 1790년(정조14년)에 계룡산(龍山) 아래로 이건했다가 다시 72년 후 1862년에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진다.

조선 시대 향교는 국립교육기관이었던 만큼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고, 교관을 파견하는 등 다양한 지원이 있었다.

하지만 향교는 15세기 이후 급속도로 약화된다. 왜란과 호란 등 전쟁으로 소실된 향교가 많았고 조선 시대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이 등장하면서 향교의 자리를 서원이 메워갔다.

향교와 서원은 공통점이 많다. 교육기관의 역할도 그렇지만 성현을 배향하고, 백성들을 교화하는 기능도 거의 비슷하다.

다만 서원보다는 향교가 더 많은 일을 담당했다. 기우제나 풍작 기원하는 사직제를 지내는 등 종교적 역할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향교는 서원과 비교하면 교관들의 수준이 낮아 과거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향교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교육적인 기능에서 서원에 밀리게 된다.

그럼에도 향교가 문을 닫지 않았던 것은 지역 사대부들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용했기 때문이다.

사회 변동으로 사대부들의 수가 급증할 때에도 사대부로서의 신분과 위엄을 유지하고 향촌민들을 통제하는 데 향교가 거점으로 이용됐다.

향교의 위엄을 잘 나타내는 것이 향교 입구에 세워진 ‘하마비’다. 거제향교 하마비는 거제면 읍내로에서 기성로 5길로 가는 입구에 위치해 있다.

하마비란 대개 왕, 장군, 성현을 모신 곳이거나 고관의 출생지, 분묘 앞에 세워 선열에 대한 공경의 뜻을 가지고 말을 멈추고 보행하도록 유도한 비석이다.

근대에 새로 새워진 것으로 보이는 거제향교의 하마비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대(大)는 고급관리, 소(小)는 하급관리, 인(人)은 당하관으로 종3품 이하의 벼슬, 원(員)은 당상관으로 통정대부 이상의 정3품 이상, 명(名)은 중인, 구(口)는 천인을 의미한다.

조선 시대에는 중인이나 천민은 향교에 올 일이 없었고 말을 탈일도 없었기 때문에 향교 앞 비석에는 ‘명(名)’, ‘구(口)’라는 글귀가 아예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향교의 교육적 역할은 유명무실해지고, 석전제 등 배향이나, 향약 등을 통한 백성들 교화에 치중하는 것으로 그 역할이 축소돼갔다.

비록 향교가 근대화,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근대적 교육체계 속에 편입되진 못하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지만, 조선 시대 지방을 대표하는 공립 교육기관으로의 기능은 물론 지역사회를 운영하는 한 축을 담당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최대윤 기자  crow112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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