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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법이 마음에서…”도안스님 /연등사 주지

- 바른정법 바른인연(18)

우리 인생이란 백년 일생 하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시이래(無始以來)로 영원히 흐르고 흘러가는 생명체의 인생이다. 그렇게 흘러가는 이 세상 모든 생명체가 병이 나고 잘 살고 못사는 것은 전부 이 마음에 달린 것이다.

예를 들어 모진 병이 들어 아무리 좋은 약을 먹는다 해도 환자의 마음에 그 약을 먹고 낫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면 약효가 떨어질 것이고, 반면에 약으로 치료가 어렵다는 병도 한 번 마음을 가다듬어 약을 먹는다면 낫는 수가 더러 있다.

지금 중생은 ‘일일일야(一日一夜)에 만사망생(萬死萬生)한다.’라고 한다. 만번 죽고 만번 사는데 무슨 약이 필요하겠는가만은.. 이것은 각자가 지은 업력(業力)으로 일일일야에 만사만생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업력에 끄달리는 마음만 바로 잡으면 병은 언제든지 낫게 마련이고, 이것이 바로 신비하고 오묘한 생명의 실상인 것이다.

사실 우리의 마음이란 모든 것에 작용되는 힘을 갖고 있다. 화가 났을 때를 한 번 생각해보자. 아무리 둔한 사람일지라도 성을 낸 얼굴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내는 얼굴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무엇이 화를 낸 것인가? 빛도 모양도 냄새도 없는 바로 이 마음에서 성이 난 것인데, 그 성난 얼굴을 살펴보면 붉으락푸르락하고 입술이 벌벌 떨리게 되는 것이, 다 생각이 움직여서 이 몸에 그만한 파도를 일으켰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또 놀랐다고 하자. 놀라면 눈이 동그래지고 눈썹이 뻣뻣해진다. 또 우리가 기쁜 생각을 하고 있어도 금방 표가 나고, 상대방이 먼저 알아채고는 “저 사람 무슨 좋은 일이 있는가봐. 얼굴에 씌어있는데..”라고 말한다. 반대로 무슨 걱정이 있어 우수가 서려 있으면 “여보게, 요즈음 근심이 있는 모양이지?”하면서 알아차린다. 이것은 모두 마음을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몸에 도장(塗裝)을 치고 살고 있다. 과거 다생(多生)에 걸쳐 착한 마음을 쓴 사람이라면 그 얼굴에 후덕함이 보일 것이고, 그래서 초면에 누가 봐도 인상이 좋음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다. 반면에 악한 마음을 많이 쓴 사람은 독해 보이며 누구든 마주 대하기 싫어짐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전생에 닦은 것이 몸에 도장을 쳐서 현재 우리의 모습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보더라도 과거, 현재, 미래의 마음작용이 얼마나 큰 증명이 됨을 알아야 한다.

중병에 걸려서 기도하는 도중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아픈 곳을 만지니 병이 다 나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그 관세음보살이 갑자기 하늘이나 외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자기 속의 관세음보살이 때가 되어 싹을 트고 나와 내 병을 고친 것이지, 바깥에서 온 것이 절대 아니다. 이처럼 우리의 이 마음속에 부처님이 항상 계신 시방세계가 함축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흔히 명산이니, 영산이나 산을 찾아 기도를 해야 도를 깨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이가 있다면 때에 따라서는 엄청난 큰 화를 자초할 수도 있다. 본래 태양의 빛은 어디나 고루 비추고 있고, 불심이 충만한 곳이 있다면, 그 곳은 전부가 다 수행도량이 된다.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어디 있는지 헤아려 보시기 바란다.

설사 성지에 계시더라도 마음이 그 곳에 없고 떠다니면, 그 곳은 한갖 야시장 바닥일 뿐, 야시장 바닥에서도 마음을 가다듬으면 그 곳이 바로 청정한 도량이 되고 성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위대한 마음을 우리가 다듬어서 쓰지 않고, 아예 사법(邪法)으로 사장시켜 버리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세상만법이 전부 마음속에서 일어난다는 원리를 알고 나면, 우리는 세상 천하의 갑부고 되고도 남는다. 바른 법(正法)을 의지한 수행의 목표는 이 마음 하나를 잘 받아쓰자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 마음을 잘 받아쓰지를 못해 늘 불안하고 불쾌할 뿐이다.

마음농사를 바르게 지으면, 설사 남이 세끼 따뜻한 밥을 먹을 때, 하루 한 끼 죽을 먹더라도 가족간에 서로 웃고 원만하게 화합하여 사는 진리가 그 삶 속에서 나오는 것이지, 바깥으롭터 오는 것이 아니다. 또 그렇게 마음을 쓰는 사람한테 먹을 밥이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 입이 모자랄 뿐이지, 절대 먹을 것이 모자라지 않는다. 또 이 몸이 모자라지 걸칠 것이 모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이 마음이 그렇게 위대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금강산 절에 살던, 앞을 보지 못하는 부부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비가 세차게 오는 어느 날, 남자 봉사가 비를 피하러 들어가 곳에 여자 봉사도 비를 피할 요량으로 들어와 있었는데, 그 날 그 인연으로 부부가 되었고, 세월이 흘러 아들을 낳았는데 다행히도 이 아들은 정상인으로 태어나 자라나서, 이들 가족이 거리를 다닐 때에는 아버지 어깨 위에 아이를 얹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들은 지팡이를 잡고 뒤에서 따라다니는데, 이 때 아들은 위에서 “아버지, 여기는 도랑입니다. 이쪽으로 가세요. 저쪽으로 가세요.”하며 부모의 눈이 되어 길을 안내하며 걸식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어느 부자집에 이르러 밥을 구걸할 때, 그 때 주인이 그 봉사가족을 보고서 그 아들이 욕심이 나자, 아들을 주면 두 내외가 편안히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재산을 주겠다고 제의했고 두 내외는 모두 고개를 내저으며 안된다고 하면서 떠났다. 호의호식을 하며 잘 사는 것만이 복이 아니며, 비록 문전걸식을 한다 해도 서로 돕고 화목하게 살며 이 아이 하나 키우는데에 행복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외부조건이 좋다고 해서 그 사람이 행복하게 산다고 할 수 없으며, 행복을 껍데기로 계산하려 한다면 어리석은 일인 것이다. 아무리 신체가 불안전하고 가난해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껍데기는 화려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이 있다. 행복은 자기 마음 속에서 현존하는 것이지, 껍데기로 치장된 마음자리에서 그 위대성을 찾을 수 있겠는가? 한 생각 돌리면 우리 인생도 180도 바뀌어 평생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다.

불교는 이 마음 변화를 일으켜 내 인생을 멋지게 살려는 철학이다. 불교 수행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다 마음바탕으로 한 길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바른 수행을 할 때 어떠한 생각도, 마구니도 침투해 오지 못한다. 어떻게 똑같은 물건을 똑같은 위치에 놓을 수 있겠는가? 어느 하나를 밀어내든가 포개지 않는 이상, 같은 위치에 같은 물건이 놓일 수 있겠는가? 번뇌 망상이 이미 차지한 그 자리에는 어떤 공부의 힘도 들어가지 못하고, 바른 공부를 하고 있는 자리에는 번뇌 망상이 침범하지 못한다.

바른 공부를 안하면 마구니가 점령하고, 바른 공부를 하면 마구니가 달아나버린다. 그래서 한 생각 지금 돌이킨데서 내 인생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을 아셔야 한다.
금강경 서두에 보면, 부처님께서 발우를 들고 밥을 빌으시고, 공양을 마친 후 의발을 거두시고 발을 씻으시는 일상생활의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나서 수보리가 그 깊은 뜻을 알고 부처님을 찬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뭘 특별나게 어렵게 가르친 것은 없다. 우리의 온갖 생활을 이끄는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의 유산인 팔만대장경이요, 가르침인 것이다.
우리 모두 바른 가르침인 정법을 수호하고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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