滸山 김현길(1956 둔덕)

경주 낭산(狼山)에 가면
내가 사랑했던 여인이
장장 천삼백육십오년을
산마루에 고운 달덩이 모양 잠들어 있다
미친 듯 헤매어 온 내 영혼
징표인 팔찌를 내보이며 그를 깨운다

늦가을 보문들
분황사, 황룡사의 흔적을 더듬어
단풍든 남산을 옛날같이 오른다
불곡 감실부처 앞에 합장한다
불국정토를 꿈꾸었던 신라

탑곡 마애쌍탑
비천상이 난다
그 옛날
탑을 감싸며 타올랐던 불길처럼
느꺼운 심정으로 입상불을 껴안는다
신비한 미소 선덕여래입상

어디서 범종 소리 은은하게 들려오고
솔숲에 부서지는 눈 부신 햇살
아! 나는 선덕을 사랑한 지귀(志鬼)
축복인 양 단풍잎이
제석궁에 흩날린다.

선덕을 만난 감격이 저리도 컸을까. 오십년 넘게 살아오면서 선덕을 품고 살진 않았으나, 천년이 넘은 전생의 연을 단 한 번의 눈길로 알아채고 만다. 시인의 뜨거운 가슴이여. 마지막 구절을 다시 읽진 않고 배기진 못하리라. 아! 나는 선덕을 사랑한 지귀(志鬼), 축복인 양 단풍잎이 제석궁에 흩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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