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둔덕, 1908-1967)

마침내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
무량한 안식이 거느린 저녁의 손길이
집도 새도 나무도 온갖 것을
소리 없이 포근히 껴안으며 껴안기며,
그리하여 그지없이 안온한 상냥스럼 위에
아슬한 조각달이 거리에 걸리고
등불이 오르고
교회당 종이 고요히 소리를 흩뿌리고,
그립고 애달픔에 꾸겨진 혼 하나
이제 어디 메에 숨 지우고 있어도,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 귀를 막고.
그리고 외로운 사랑은
또한 그렇게 죽어 가더니라.

1952년 9월 25일 청마

말로만 들었던 책, 시조시인 정운(이영도)이 청마에게서 받은 연서를 엮은 책,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구하였다. 글의 날짜까지 선명하게 찍혀있어 사실감이 좋아 편지글을 읽는 느낌이 청마 선생님을 바로 곁에 두고 읽는 듯하다.
이 시가 들어 있는 편지는 다른 편지와는 달리 상당히 길게 쓰여 있었는데, 당시 정운 시인께서 몸이 편찮았던 모양이다. 건강과 쾌유를 바라는 청마의 마음이 군데군데에 들어 있었다.
무량한 안식과 안온한 상냥스럼, 아슬한 조각달이 거리에 등불처럼 걸리고, 혼은 항상 애달프고 그리운 모습으로 숨죽인 듯 있어도, 행복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애달픈 사랑이 죽어가는 것조차 행복이자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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