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면 눈물이 먼저 나는 그리움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 기다림을 끝내면 다른 누군가는 기다림을 시작한다고 하는데, 아직도 그들이 기다리는 그 사람은 기다림을 끝내지 못한다. 그들이 아직도 목 놓아 기다리는 걸 보면... 부르면 눈물먼저 나는 그리움이 된 이름 하나. 오늘도 눈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맞다! 맞제? 얼굴 생김새가 예전 지 애비를 꼭 닮았다 아이가~』
지난 3일 기자가 찾은 장목면 농소마을엔 30여년전 불던 그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마을 어귀 양지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노인들에게 다가가 30여년 전 납북된 어부들의 사진이 담긴 신문을 보여주자, 마을 이장을 비롯한 10여명의 노인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사진 속 인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마다 반가움과 한(恨) 섞인 한마디씩을 쏟아 냈다.

1972년 12월 그날의 사건이 있은 지 30년이 넘었지만 주민들은 『아이고, 맞네』라며 아물던 상처가 덧난 듯 다시금 회한(悔恨)의 격정으로 혀를 찼다.
「시간이 다 해결해준다」는 말도 이 마을 주민들에게만은 「뜬 구름 잡는 소리」로 들리는 모양이다.

농소마을은 당시 90가구 중 11가구에서 가족이 납북되는 화를 당했는데 납북된 가족의 생사조차 모른 채 30년이 지났어도 그 아픔이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 어부들은 모두 정부의 납북 억류자 명단 4백86명에 올라 있다.

기자가 태어나기도 전인 1972년 12월28일, 부산선적 오대양 61.62호(약1백톤급) 쌍끌이 저인망 어선 두척은 서해로 홍어잡이를 나섰다 부주의로 북방한계선을 넘었고, 월선을 알아챈 뒤 급히 돌아오다 북한군에 발견돼 피랍된 것이다.

당시 정부는 이 같은 사실을 공식 발표 하지 않았고, 주민들도 그냥 파도에 휩쓸려 난파된 줄 알았다고 한다.
납북된 오대양호에 마을 청.장년 12명이나 포함됐던 것은 이 배(61호)의 선장 박모(당시 54세)씨가 농소마을 주민이었기 때문이라고. 당시 농사일 외에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던 주민들은 박 선장 집안일을 대신 해주는 등으로 눈도장을 찍어 이 배에 취업할 수 있었다.

『큰돈 한번 벌어 보겠다고 배 타고 나갔는데 그리 될 줄 우찌 알았겠노』라며 주민들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오대양호 납북이후 졸지에 두 아들을 잃어버린 박규순 할머니를 비롯한 농소마을 11가구의 삶은 하루하루가 애간장이 끊어지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한참의 세월이 지난 뒤 오대양호가 납북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들의 생사조차 모른 채 납북자 가족들은 엉뚱한 오해(?)까지 받아가며 주변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이중삼중의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고.

주민들도 군사정권 시절 이른바 농소마을이 「빨갱이 마을」로 낙인찍히는 바람에 사소한 여행이라도 할 때면 매번 감시를 당했고 자녀들의 취업에도 상당한 불이익을 당하는 등 말못할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은 유난히 발길이 무겁기만 했다.

죽기 전 한번만 더 만났으면...

두아들 한꺼번에 잃은 박규순 할머니

박규순(80) 할머니. 30여년 전 금쪽같은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납북) 기구한 삶의 주인공. 30여년의 한(恨)을 안고 살아온 삶의 무게는 너무도 무거운데, 거처는 새털처럼 가벼운 오두막집이다.

지난 2003년 2월23일 제6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 꿈에도 그리던 아들을 만나 어린애 마냥 행복해하며 울부짖던 박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은 외손자(15)와 단둘이 살고 있는 박 할머니는 깊게 패인 주름과 말라버린 입술이 그 동안의 어려움을 짐작케 한다.

예전 상봉장면이 실린 새거제신문(160호)을 건네자 사진속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이 신문 좀 주고가면 안 되나』라고 매달린다.

박 할머니는 생활보호 대상자로 지정돼 한달에 30여만원의 생계비를 지원받아 근근이 연명하고 있다고. 『이태 전 꿈에 그리던 아들을 만난 뒤 보고픈 마음만 더 커졌지요. 정부에서 가끔 오는 연락도 이젠 뜸합니다』 북에 남아있는 아들을 죽기전 꼭 한번만 더 볼 수는 없느냐며 되레 기자의 소매자락을 끄는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도 애처로웠다.

덧 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달력을 바라보며, 저녁이면 날마다 숫자 적힌 달력을 한장 한장 찢어버릴 것 같은 박 할머니의 모습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분단의 아픔」이 왜 이다지 가혹한 것인지 안쓰럽기만 했다.

이동열  skj633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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