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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와 스마트폰김한주 /변호사

나는 아직 현대인의 필수품이나 다름없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다. 지역에서 정치를 한다는 사람이 아직도 전화 받기와 걸기, 문자 주고받기 정도의 기능만 사용하는 구형의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있으니, ‘아날로그’급 정치인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더 나아가 요즘 TV에 나오는 통신사들이 쏟아내는 광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모른다. 정치와 직업을 떠나 시대에 뒤쳐진 세대가 된 느낌마저 들게 된다.

아마도 요즘 젊은 세대는 오래전 자취를 감춘 통신기기인 소위 ‘삐삐’의 존재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최근까지도 전국에 몇 사람이 ‘삐삐’를 사용해서 기지국을 폐쇄하지 못하던 통신사가 수 억원을 지급하고 ‘삐삐’를 반납(?)받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나보다 더 ‘아날로그애호가’들이 있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따라 올 테면 따라와 봐’처럼 속도경쟁의 광고홍수 속에 살고 있다 보니, 현실의 모든 일들도 속도가 중요한 것처럼 돼 버렸다. 어느 외국인 노동자가 한 방송 인터뷰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배운 말이 “빨리 빨리”라고 답하는 것을 보고는 씁쓸한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속도전(戰)의 뒷면엔 성과주의와 업적주의가 숨어 있다. 국가의 백년대계라 할 수 있는 사업들조차 성과주의에 쫓겨 ‘번갯불에 콩 볶듯’ 해치우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선진국에서는 오랜 시간을 두고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이루어진 사업들이 우리나라에서는 형식적인 공청회 한두 번으로 끝내는 경우도 다반사다.

4대강사업이 그렇고, 운화사업이 그렇고, 천문학적인 예산이 소요되는 도로와 철도건설과 개통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결과는 부실을 낳고, 산업재해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희생되기도 한다. 장(長)들과 정치인들의 임기 내 업적을 위해서는 ‘일단 밀어붙이고 보자’는 식이다. 그 결과는 종종 뉴스를 통해 우리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인재(人災)를 불러일으키고, 기차는 무시로 고장이 발생하고, 심한 경우는 개통도 못한 채 애물단지로 전락하기도 한다.

우리지역에서도 미래를 결정지을 수 있는 사업들이 공약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의견수렴절차나 주도면밀한 검토 없이 행해지려고 하고 있다. 차세대산업단지라는 명분으로 대규모의 매립을 서두른다거나 많은 자치단체에서 이미 실패한 유사한 사례가 있는 ‘00공사’식의 지방공기업을 만드는 것 등이 그 예다. 설령 그것이 옳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임기 내에 반드시 이루어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한다.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라면 수장(首長)이 바꿔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번쯤 속도와 성과주의에서 벗어난 정반대의 모습도 쳐다볼 필요가 있다. 슬로시티(Slow city)가 그것이다. ‘유유자적하는 도시, 풍요로운 마을’을 추구하는 것이다. 전통과 자연생태를 슬기롭게 보전하면서 ‘느림의 미학’을 기반으로 인류의 지속적인 발전과 진화를 추구해 나가는 도시를 만들고자하는 노력이다. 세계 백여 도시가 가입돼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우리 지역과 가까운 하동군 악양면, 영화 ‘서편제’촬영지로 유명한 청산도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부럽고 한편으론 우리지역의 현실이 아쉽다.

행복한 삶은 속도와 자본, 그 것에 터 잡아 이루어지는 현대적 문명만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대규모의 토건(土建)사업은 편리함과 인공적인 미(美)를 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 반면 천혜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잃게 한다.

‘삐삐’를 통해 연락을 받고, 또 전화를 하기 위해 공중전화에서 순서를 기다려 정겨운 친구의 목소리를 듣던 그 시절이 가끔 그리운 것은 단순히 ‘추억이라서’ 만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새거제신문  saegeoj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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