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문예회관 공연대관팀장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날씨에 겨울의 초입을 느낄 수 있다. 때 맞춰 전국적으로 신종 인플루엔자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다. 이맘때 평생 지병인 기관지염으로 고생하시다가 결국 합병증으로 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보고 싶다.

이심전심이랄까 서울에 살고 있는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예술의 전당에서 김성녀 씨의 일인극 ‘벽속의 요정’을 관람했단다. 동생은 배우의 훌륭한 연기로 마치 그 시절을 여행한 기분이라며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고 한다.

극의 내용은 전쟁 탓에 부당한 오해를 받아 수십 년 동안 다른 사람 앞에 나서지 못하고 벽장 속에 숨어서 딸아이의 성장과정을 남몰래 지켜보아야만 했던 아버지를 둘러싼 가족이야기다. 동생은 연극의 장면 장면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교차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단다. 아버지가 느꼈을 고통과 딸에게 주었을 사랑이 묵직한 그리움으로 다가온 때문이리라.

이렇게 한편의 연극은 동생에게 잊고 살았던 아버지와 아버지의 고향, 아버지의 어머니인 할머니를 포함한 혈육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쉽게 그리고 강렬하게 되살려 주었다.

평소 호수같이 조용하게 가정을 이끌어 오신 아버지는 때론 술이 얼큰한 날이면 6.25 전쟁 통에 산산이 해체된 가족사에 대한 기억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나는 너무 어렸을 때라 그런 아버지가 이해 안 되고 서럽기만 했다. 어설픈 상추쌈을 내 입에 넣어 주시던 모습과 가끔씩 엄마 몰래 과자 사먹으라고 50원짜리 동전을 건네주던 모습이 선하다. 그리고 아주 가끔 기분이 좋으시면 초가삼간을 흥얼거리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려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이태 전 연휴를 이용해 친정에 다니러 갔다가 근처에 살고 있는 동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를 모시고 근사한 저녁을 사겠단다. 지난날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위한 바쁜 사회 활동에서 풀려나 집에 칩거하다시피 한 아버지. 쓸쓸한 집안의 분위기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게 해 드릴 겸 번화한 시내로 모셨다. 아는 것 많고 사근사근한 성격으로 우리 집안 해결사로 통하는 제부는 벌써 식당에 자리를 잡아 놓고 있었다. 반주로 주문한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장인과 두 사위들의 정겨운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

저녁 식사 후 동생 내외는 아버지의 외출을 이렇게 끝낼 수 없다며 2차 노래방을 제의하였다. 나는 우리집안의 권위의 상징인 아버지 면전에서 유흥업소 운운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것 같아 동생을 쳐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이 결정을 못 내리고 장인의 처분만 기다리며 난처해하는데 뜻밖에도 술이 보기 좋게 오르신 아버지는 과히 싫지 않은 표정으로 맏사위에게 결정권을 일임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난생 처음으로 노래방을 가게 되었다.

우린 아버지와 이런 자리가 처음이지라 한동안은 어색하기만 하였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 챈 아버지는 분위기 전환을 위해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섬마을 선생님’과 ‘초가삼간’을 멋들어지게 부르셨다, 눈을 지그시 감고 흘러간 청춘을 아쉬워하듯 젊었던 시절을 회상하는 당신의 모습에서 전쟁 통에 부서진 가족사에 대한 정한이 느껴져 가슴 저미던 기억이 새롭다.

그날 아버지와 함께한 노래방 이후로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버진 때때로 자식들과 어울리고 싶어도 권위와 체통 때문에 부자연스레 행동하지 않았을까? 명절 때면 자식들은 예의범절을 갖춰 문안 인사를 올리고 조신한 몸가짐으로 의례적인 대화를 몇 마디 건넨 후 건넌방으로 건너가 버렸지 않았을까?

그러나 살아오면서 간혹 아내에게도 자식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뇌와 갈등 속에서 홀로 번민하셨을 아버지. 그런 아버지는 오늘만큼은 당신의 노래방에서 진솔한 감정을 표출 하셨는지 모른다.
전통적인 부권이 허물어진 혼돈의 시대에 훈육과 위엄으로써 가정의 질서를 통솔하셨던 아버지이신데 눈높이를 자식에게 맞추어 주시는 노년의 넉넉함도 느낄 수 있었던 기억이다.

6.25참전 용사로 국립묘지에 잠들어 계시는 아버지는 생전에 남북통일이 그토록 강렬한 숙원이었지만 당신 세대가 겪은 분단의 아픔은 세월이 흐르면서 시나브로 잊혀 간다.
돌아가시기 두 달 전 내손을 꼭 잡고 거가대교가 완공되면 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고 싶다던 소박한 아버지의 소망은 영영 꿈으로 끝나버렸다. 살아 계실 때 좀 더 다정한 딸이 되어드리지 못한 아쉬움은 나도 모르게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라는 유행가 곡이 흥얼거려진다.

새거제신문  saegeoj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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