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순련 /신현초교 교사

다른 계절에 비하여 가을은 어쩐지 사람의 마음을 스산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잘도 살아왔던 삶을 반추해보기도 하고, 내 잘못을 찾아 스스로 자학해 보기도 하며, 잊고 살았던 누구에게라도 전화를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솟는 계절이기도 하다. 새싹이 움트고, 신록이 세상을 초록으로 물들게 만드는 계절과는 확실하게 다른 성정이 움트는 아름다운 심미적 인간이 되어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몰래 서점을 둘러보기도 하고 먼지 쌓였던 책꽂이에서 묵은 시집이라도 꺼내 책 속으로 빠져드는 독서의 계절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원래 가을은 가장 책이 안 팔리는 계절이라고 한다. 새해가 시작된 1월이나, 휴가철인 7월에 비하여 10월은 책 판매율이 4배 정도나 떨어지는 계절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가을 하면 이구동성으로 독서의 계절이라고 말할까? 그것은 책이 가장 팔리지 않는 달이라서 책을 팔리게 하기 위해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지칭했다는 말이 있지만 신빙성은 없는 이야기이다.

독서는 문화활동 중의 가장 으뜸인 고급적 문화생활의 일면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은 독서활동을 통하여 그 자양분을 마련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 이래 지식 습득의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한다. 독서를 통하여 자신을 뒤돌아볼 수 있고, 자신만의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으며 삶의 중요한 고비마다 그 해결점을 찾아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런 중요한 독서활동이 인터넷문화와 컴퓨터에 밀려 이제 우리 국민들의 독서수준은 OECD수준의 최하위 수준에 속하며 국민들의 독서량은 년 약 1,59권(갤럽조사)에 그친다고 한다. 또한 우리나라는 문화비보다 통신비가 훨씬 더 많이 지출된다고 하니 우리 국민들의 독서문화생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추측할 수 있다.

어머님이 하루 일과를 보내고 계시는 노인정을 찾아갔더니, 열 분 정도의 할머니들은 즐거운 놀이에 빠져있고, 몇 분의 할아버지께선 바둑을 두고 계셨고, 친정어머님은 허리에 베개를 받쳐두고 책을 읽고 계셨다. 누렇게 빛바랜 가로10센티, 세로 15센티의 아주 오래된 춘향전이다. 그 책을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종가집 맏며느리인 어머님은 할아버지때부터 살아왔던 종가집을 떠나 몇 번의 이사를 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으셨다. 이사를 할 때마다 종가집을 지키기 위해 필요했던 그 많은 생활용품과 집기들은 한 가지 한 가지씩 설 자리를 잃어 어머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비운을 겪어야했다.

조상을 지키던 성주단지도, 제사를 잘 지내기 위해 논 한 마지기를 팔아서 마련했다던 유기그릇도, 안청에 떡 버티고 가문의 역사를 지키고 섰던 그 많은 생활집기와 장독들도 결국 어머님 곁을 따라오지 못하는 슬픔을 당할 때 친정을 떠나온 지 30년이 넘은 둘째 딸도 그 슬픔에 가슴아파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어머님은 어린 시절 우리에게 읽어주었던 그 이야기책들을 챙겨 어떻게 지금까지 간수하여 왔단 말인가? 누런 황색종이에 요즘 컴퓨터 글씨로 보면 10포인터 정도의 아주 작은 글자와를 세로로 쓴 책이다, 제목도 달아나고 책 네모서리가 반질반질 닳아서 너덜너덜 다 헤진 그 책을 어머님은 하루도 손에서 놓지 않고 읽고 계신다고 곁에 계신 할머니 한 분이 귀띔을 해 주셨다.

어릴 적 어머님은 농사일이 아무리 바빠도 호롱불빛 밑에서 우리들에게 책을 읽어주셨다. 춘향전 이야기도, 숙향전 이야기도, 구운몽도 어머님을 통하여 어린 시절에 몇 번이나 들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우리 일곱 남매는 그 작은 방의 호롱불 밑에서 어머님의 책읽어주는 재미에 푹 빠졌다. 춘향이가 십장가를 부르며 서울 간 이도령을 기다리는 장면을 읽을 땐 우리도 눈물을 흘렸고, 어린 심청이가 아버지의 눈을 구하기 위하여 인당수에 빠졌을 때 그 어미가 나타나 어린 심청이의 손을 잡고 불렀던 노래를 들려주시던 어머님의 노래를 나는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아가 내 딸 청아, 손발이 고운 것은 어찌 이리 날 닮았고, 눈매로 고운 것은 너희 아비 영판이네.”
우리는 이런 어머니의 낭송을 하도 많이 들어서 어떤 대목에서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며, 어떤 장면은 어머님께서 벌떡 일어나셔서 행동으로 그 장면을 연출하는지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 시절 우리를 그렇게 즐겁게 상상의 세계를 꿈꾸게 했던 그 이야기책들을 어머님은 아직도 그렇게 진주단지처럼 모시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모두 습관에 의하여 그 사람의 평생을 좌우하게 된다. 바른 생활, 반듯한 자세, 정식한 마음도 어릴 때 습관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평생을 편안하게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독서도 습관이다. 어릴 적 어머님의 독서습관은 어린 나에게 무언의 습관으로 굳어져 잠자기 전 책을 읽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만큼의 독서생활을 생활화하게 만들어주었다.

어머님의 독서생활이 바로 자녀의 독서습관을 결정짓는 것이다.
참 좋은 계절이다.
손닿는 곳에 책 한 권을 올려두고 이 가을을 보내보자.

새거제신문  saegeoje@paran.com

<저작권자 © 새거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