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돈묵 /거제대 교수

추석 명절이 지나갔다. 연휴기간이 짧아서 교통대란이 우려된다더니, 수월하게 지나갔다. 신종 플루로 외국여행도 자제하고, 대부분 고향으로 향해 귀성길이 막힐까 우려했는데, 별 탈 없이 잘도 지나갔다.
차창으로 스치던 들판의 벼이삭이 아직도 눈 속에서 너울거리는데 마음은 그렇게 풍요롭지 못하다. 들판은 분명 풍년을 예악하고 있건만 우리의 마음은 왜 이리도 허전할까. 자연이 우리에게 준 것이 양에 차지 않아서일까. 그 어느 해보다 금년의 들판은 황금물결인데.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 어느 해보다도 허전에 떨고 있다. 사람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명절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떠나버리고 들판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다. 짧은 연휴에 길이 막힐 것이라는 지나친 예측이 많은 사람들의 발목을 잡아놓은 것일까. 자신을 낳아주신 부모가 살고 있고, 어린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고향을 찾기보다는 하루의 휴식을 선택한 데는 어떤 심리가 작용한 것일까.

우리의 조상들은 철저하게 음양의 원리에 의해 사고하고 행동했다. 그 뿌리는 깊어서 의복의 단추 하나를 다는 데까지 영향을 미쳤다. 남자의 옷은 왼쪽이 위로 가도록 단추를 달았고, 여자의 옷은 그 반대였다. 절을 해도 남자는 왼손을 위로, 여자는 오른손을 위로 하도록 한 것도 역시 음양의 이치에 따른 것이다. 또한 양(陽)의 수가 겹쳐진 날은 명절이라 하여 대략 두 달에 한번씩 휴식을 주는 삶의 악센트를 마련하였었다.

그러면서도 구정과 추석에는 고향을 찾아 웃어른에 감사하고, 조상의 음덕(陰德)을 기리도록 했던 것이다. 그 까닭에 지금보다 훨씬 살기가 팍팍했던 시절에도 이 두 명절에는 고향을 찾는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고향 가는 차표를 사기 위해 담요 한 장 뒤집어쓰고, 추운 겨울밤을 지새워도 마음은 언제나 즐거웠다. 버스든 열차든 빈 공간 하나 없이 선물 꾸러미가 가득했던 것도 그 시절의 풍경이다. 몸은 비록 고되어도 고향에 간다는 즐거움이 있고, 부모를 찾아간다는 설렘이 있었다.

앞만 보고 달리던 일상을 잠시 멈추고,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와 기회를 갖도록 하고, 친척간에 한자리에 모여 혈육의 정을 나누도록 한 것이 조상들의 지혜라면 그것을 멀리할 일은 아니다. 구정, 삼짇날, 단오, 칠석, 중양절 등 양의 수가 중복된 날은 가장 양이라 하여 잠시 삶을 내려놓고 마음을 가다듬게 했던 지혜. 이것은 분명 우리의 삶에 매듭을 형성해 주는 슬기였다. 이 매듭으로 하여 우리는 올곧게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사람들은 목에까지 차 오른 숨을 고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제거하기에 바쁘다.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일상에 젖어 어떠한 여유도 끼어들 수 있는 빈틈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내처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며 만족해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만을 알게 되고 남에게 배려하는 마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함께 어우러지며 느끼는 즐거움에 현대인들은 가치를 두지 않는다. 오로지 내 안에서만 즐거움이 움트고, 그 안에서 멈추는 것만이 내 것으로 안다.

명절을 맞아도 고향보다는 자신의 편안함과 이익을 헤아린다. 서로의 정을 나누는 데도 만나서 살을 비비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해결하려 한다. 웃어른을 찾아뵙고 감사의 뜻을 전하기보다는 선물덩이의 탁송을 선택한다. 여기에서는 결코 깊은 정을 맛볼 수 없다.
이제 우리도 달려올 만큼은 달려왔다. 좀 여유를 가지고 자신이 달려온 길을 성찰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왜 달려 왔는가도 따져 봐야 한다. 달리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달려왔다면 진정 그러한 삶을 꾸리는 것도 지혜로워야 한다.

모든 삶에는 인간이기를 고집하고 싶다. 사람답게 살기를 고집하고 싶다.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려면 사람 냄새를 피워야 한다. 너무 야박하여 실리를 찾고, 약삭빠르게 타산적이면 안 된다. 눈앞의 이익에 큰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그러한 실수는 자신의 앞날에 커다란 장애가 되어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조금은 손해를 봐도 사람 냄새를 가지고 살아가야 함을 이 계절에 절감한다.

비록 몸이 고되고 명절 증후군에 시달리더라도 추석과 구정만은 서로의 정을 확인하는 나눔의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귀성길이 고통의 길이 되고, 술에 절어 육신이 무너질 지경이 되더라도 부모와 형제가 모이는 명절에는 고향으로 달려가던 마음. 나 혼자의 안식의 시간보다 혈육이 함께 하는 즐거움이 있는 그런 명절을 갈망하던 그 마음. 이 마음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혈육이 함께 할 수 있는 명절을 통해, 무너진 우리의 가정문화를 되찾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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