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근 /고려대 명예교수

지난 100년 동안 우리 민족은 세찬 격동 속에서 천지개벽에 가까운 기적을 일구어내면서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행정구역 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부분적으로 손질을 한 적은 있지만 몸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돌부처 같이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버티고 있다. 최첨단 IT기술 대국의 반열에 올라 변화의 상징으로 떠오른 나라에서 이런 믿기지 않는 어두운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요즘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행정구역 통합의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거제에서도 이미 몇 해 전부터 말이 있어 왔다. 다만 법안통과가 거의 확실시 되고 대통령의 의지가 확실하고 정부의 실행일정과 방법이 구체적으로 밝혀지면서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서두르면서 사회문제로 다시 떠올랐을 뿐이다. 이 시점에서 행정구역 통합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할까 말까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해야 하고 할 수 밖에 없는 필수과목이다. 다만 통합지역, 방법, 효과의 극대화 등과 같은 문제를 놓고 벌이는 갑론을박은 있을 수 있고 당연히 있어야 한다.

현대인은 컴퓨터, 휴대전화, 신용카드, 지문이 지워지지 않은 손가락 등과 같은 간단한 도구만 갖고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정보통신 융합시대에 살고 있다. 일부러 힘든 발품 팔면서 은행이나 행정기관에 가서 머리 조아리고 민원 부탁할 필요가 없다. 저비용 고효율의 생활방식이 깊숙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과는 달리 아직도 고비용 저효율의 의식과 관행의 뿌리가 뽑히지 않은 현장도 많다. 바둑판 같이 갈라진 지자체마다 공무원 수 늘리고 호화판 청사 짓고 중복투자 하는 등과 같은 고약한 관습이 여전히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악습은 혁명적인 개혁 없이는 치유가 불가능한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고질병이다. 행정구역 조정으로 이런 고비용 저효율의 낭비요소들을 정리하고 행정체계를 정예화 하여 머리로 하는 권위주의적 탁상행정을 가슴을 갖고 발로 뛰는 봉사행정으로 바꾸고 혈세를 아껴보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탁상행정이 현장행정으로, 규제행정이 봉사행정으로, 공급자중심 행정이 수용자중심 행정으로 바꿔 보자는 것이다.

거제는 아직 조선 산업 덕분에 먹고 살만하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 생각하면 인근 지역과의 통합은 손해 보는 장사일수도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거제의 산업구조는 매우 단순하고 허약하다. 조선 산업이 기우뚱 거릴 때 균형을 맞추어줄만한 대체산업기반이 매우 빈약하다. 거제가 앞으로 수백 년 동안 자족자립 할 수 있는 확고한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기반을 갖춘 탄탄한 도시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독자생존이란 말하기는 쉽지만 실현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상호 보완 하면서 상승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는 조건과 특성을 지닌 지역끼리 뭉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유럽은 경제통합에 이어 국가통합까지도 이룩했다. 한국 중국 일본 3국도 경제통합과 자유로운 왕래를 실현하기 위한 구상과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인터넷상으로는 인종이나 국가 간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진 지 오래다.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는 신분증 하나 갖고 세계 곳곳을 이웃집처럼 들락거리는 세상에서 살게 된다. 넓은 세계무대를 향해 달려가려는 후세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위치한 이웃 지역과 경계를 긋고 네 것 내 것 따지는 옹졸한 세계시민으로 키울 수는 없다. 이들은 좁은 울타리 개념 따위는 거부하고 머릿속에 담지 않으려는 세대다.

기성세대는 행정구역 개편이 쉰세대인 자신들이 아니고 이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이끌어 갈 자라나는 신세대를 위한 필수적 과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행정구역 개편은 자연스럽게 선거구제 개편과도 연결되기 때문에 선출직 자리에 있거나 앞으로 나설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설 땅이 좁아 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속 좁은 걱정에 사로잡혀 통합에 소극적이거나 반대를 할 수도 있다. 거제의 현역 선출직 공인들은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에 정치 도의적으로 큰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윤영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의 초상화를 내걸고 당선된 사람이고, 김한겸 시장과 옥기재 의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의원들은 한나라당 깃발을 내걸고 당선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통령의 정치철학과 한나라당의 정책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다. 뒷짐 지고 있을 처지가 아니다. 이들은 기득권을 포기할 각오로 그리고 정치적 이해관계를 초월해서 시민, 특히 젊은 계층에게 다가가서 통합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설명하고 의견을 수렵하고 협조를 구하고 행정절차를 진행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거제시민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통합대상지역은 통영·고성 혹은 부산, 더 크게는 부울경(부산 울산 경남)이다. 이들 지역민들 마음속에는 역사?문화?지리적으로 ‘우리는 남이다!’가 아니고 ‘우리가 남이가?’라는 정서가 깊게 깔려 있다. 지금 공론화의 불을 누가 먼저 지폈는지 누가 주도권을 잡았는지를 따질 필요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다. 자율통합의 시한이 지나면 강제통합이 이루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그 이후에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현상과 사물은 자체모순이 있다. 행정통합이라는 현상도 분명히 부정적 요소와 모순이 있다. 이를 극복하고 지양하는 의지와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거제시민들은 금전으로 환산이 불가능할 정도의 엄청난 가치를 지닌 정신적·제도적 자산을 후손에게 물려준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통합작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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