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영 /수필가

우리 문화 전승을 위해 일생이 바쁜 ㄱ선생과 분과 담소를 나누던 중, 그분의 경험담에 귀가 곤두섰다. “유럽에 방문을 했을 때였다. 각국 학자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이동 중, 차 안에서 노래자랑 시간을 가졌다. ...마침내 한국 차례가 되었다. 우리측 교수 한 분이 ‘오 솔레미오’를 열창 했다. 그런데 노래가 끝나자 모두 손뼉 대신 우~ 야유를 보내지 않은가. 루치아노 파바로티 못지않은 숙련된 가창실력이라 탄성이 터질 법도 한데 뜻밖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곧 사회자(외국인)가 원인 규명을 해 주었다. ‘당신은 자국의 노래를 두고 왜 이탈리아 노래를 하느냐. 다시 불러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남 출신 그가 다시 부른 게 ‘진도 아리랑’이었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데~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부르다보니 흥이나 문경 새제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다, 대목에 가서는 엉거주춤 일어나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다” 언어(노래)는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일 뿐 아니라 생각을 형성하는 도구가 된다. 자신 부른 노래, 그것도 머나먼 타국에서 모국(고향)의 정서를 환기 시키다보니 그 감동이 배가 될 수밖에. 관객들에게서 박수갈채를 받은 건 물론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지난주 수업시간에 다룬 ‘토박이말과 들어온 말’을 떠올렸다. ‘우리는 예로부터 한문을 써오다 세종께서 한글을 창제했다. 그러나 연산군의 언문말살정책에 이어진 갖은 수난으로 인해 우리글은 죽음 같은 신세가 되었고, 갑오개혁이후에서야 언문이 법령으로 1차적인 글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언문을 서민이나 사용하는 글이라 천시하여 당대 사료, 개인 기록, 문집 등은 모두 한자로 썼다. 왜정시대 그 모진 고난 속에서도 주시경 님 덕분에 간신히 한글이란 명칭을 얻어 우리는 이 모국어의 바탕으로 생존하고 있다. 그런데 21세기 지금은 어떤가. 지난 역사 못지않을 만큼 모국어가 짓밟히고 있으니...’라는 나의 개탄에 한 학생이 토를 달았다. ‘영어 잘하면 우리글 실력이 부족해도 된다고 여기게 된 데는 토익·토플 점수가 인생을 좌지우지 하게 만들어 놓은 상부 탓이 크다’는 것이다.

재차 우리 노래를 불러 좋은 호응을 받았다지만, 모두 자국 노래를 선뜻 들고 나올 때, 우리 대표만이, 그것도 사회 지도층 인사라고 하는 사람이 남의 것을 무심코 부른 그 사고방식 자체가 언어의 사대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지금 우리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선생이 덧붙여 말했다. ‘공연차 여러 나라를 다니지만 아직도 한국이란 나라를 모르는 국민들이 많더라. 우리 것을 천시하고 남의 것을 무조건 선호하는 이 땅 위의 현실이 참으로 걱정스럽다.’ 그 말씀에 백번 공감하여 나도 맞장구를 쳤다.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히 금빛 게으른 울음’, 가곡 ‘향수’에서 만약 시인의 고향 언어(사투리)인 ‘해설피’ 대신에 외래어 따위를 넣었다면 그 고향의 풍경과 어릴 적 추억이 고스란히 드러났을까요. ‘혼불(최명희)’이란 단어도 비표준어지만 작가의 고향 전라도 사투리를 제목으로 썼기에 그 지방 생명의 불, 정신의 불을 일컫는 전체적인 내용이 직관으로 와 닿지 않습니까.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한글의 가치부터 깨닫게 하는 것, 그 운동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 같아요”

어릴 적부터 학력부진인 아이들을 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진정 국어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학부모에 의해 어린 시절부터 영어식 문법과 영어식 대화법에 길들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이다. 모국어 실력이 기본으로 안 되어 있으면 외국어 실력도 향상되기 힘들다는 언어학자의 진단이 있다. 이는 나라의 정신이요 얼(넋)인 국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한 그 바탕 위에 외국어를 입혀야 순서가 맞아 공부의 효율성도 높다는 뜻이다. 그 말에, 대학 졸업 하던 날 모교 총장 연설에서 화가 났다는, 한 미국 유학생이 생각났다.

‘여러분은 이제 캠퍼스를 벗어나 훌륭한 인재가 될 것입니다. 남미로 아프리카로 그리고 저기 먼 아시아까지 진출할 것입니다. 중국에서, 일본에서, 홍콩에서, 대만에서, 베트남에서 그리고 말레이시아와 태국에서 훌륭한 산업역군이 될 것입니다. 세계각지에서 온 학생들이 미국의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으니 총장이 연설에서 이처럼 여러 나라들을 각각 호명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거기엔 ‘한국’이 빠졌고, 나는 순간 착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급속한 경제발전, 올림픽과 월드컵, 아시아를 휩쓴 한류 등 한국의 국가 브랜드가 그동안 많이 개선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외국에 나가 ‘한국’을 아느냐고 물으면 잘 모른다는 쪽이 생각보다 많다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의 국민의식은 갈수록 ‘오 솔레미오’화 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차에서 동석한 외국인이, ‘한국인은 외국문화에 전세 들어 산다’고까지 하더라는 ㄱ선생 귀띔에, 타국에서 아리랑을 듣던 그 심정과 다른 성질의 슬픔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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