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돈묵 /거제대 교수

양반과 상것의 구별이 현저했던 옛날에는 그들의 생활 속에 권위주의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양반은 대부분 위에서 지시하고, 상것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논리 아래 그들은 철저하게 권위주의를 지켜나갔다. 양반은 양반대로 자신들의 위치가 평민과 상것들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고 권위주의로 무장했고, 상것들은 그들대로 다른 상것들보다 먼저 철저히 이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양반은 어떠한 문제를 풀어감에 있어서 일의 순리에 따라 지혜롭게 해결하기보다는 상것들을 향해 큰소리만 치면 되었다. 문제의 속성이 뭐고, 더 나은 방법이 무엇인지 알기에 앞서 저항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열외 시키고 따돌리면 되었던 것이 옛날의 실정이다. 이에 따라 상것들은 그 말의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었다.

그 시절의 분위기에서는 바로 제거되었어야 할 말이 오늘날까지 온전히 살아남은 고사성어가 하나 있다. 경당문노(耕當問奴). 즉, 밭갈이는 마땅히 노비에게 물어야 한다는 말로 전문가에게 물어보라는 뜻이다. 속사정이야 어찌 되었던 큰소리만 치면 되었을 사회에서 양반이 노비에게 자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다. 나보다 나은 식견을 가졌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의 고견에 귀기우려야 함을 일깨워주는 말일 게다.

요즈음에 와서 느닷없이 이런 경당문노의 지혜가 그립기 시작한다. 아직까지도 관(官)을 다스림의 주체이고, 민(民)을 행정과정의 피동적 객체로 인식하는 공직자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본래 공직자의 대표 격인 장관(長官)의 뜻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심부름꾼’이었다. 15세기부터 서양에서는 장관을 의미하는 말로 미니스터(minister)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의 뜻은 ‘여염집 심부름꾼’이다. 서양 정치에서 로비스트를 인정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문화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또 우리의 경우를 보면 고려시대에 장관을 상서(尙書)라 했는데, 이 말의 뜻 역시 ‘심부름꾼’이다. 결코 다스리는 주체가 아니고, 심부름꾼인 것이다.

심부름꾼을 자처했다면 국민의 가려운 곳이 어딘가를 알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비록 가려운 데를 긁어 주진 못하더라도 알아내려는 노력의 흔적은 있어야 한다.
행정가는 업무 추진의 전문가이다. 그러나 실행 이전에 일의 정확한 파악과 올바른 길의 선택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이 때에 전문가의 고견이 가미되어야 일은 성공한다.
이 과정을 무시하고 독단과 아집에서 전문가의 의견을 무시한다면 실패할 공산이 크다. 행정가는 일 추진의 심부름꾼이지, 그 숱한 민원과 시정에 대한 것을 아는 전문가는 아니다. 집행에 앞서 그 문제에 대한 자문을 실시하여 좋은 결론에 도달하기까지는 경당문노의 정신이 필요하다. 무조건 결론을 내려놓고 민이 따라주기만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 거제시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에도 전문가의 의견은 절대적으로 있어야 한다. 대부분이 이런 절차를 이행하고 있고, 순리적으로 풀어가고 있는데도 간혹 만족스럽지 못한 현상이 나타나 시민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앞으로 실시될 시정 중에는 시민들의 의견을 규합하고 하나로 뭉쳐서 모든 힘을 추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예를 들면 갯벌 복원사업, 사회복지관 운영 사업 등은 특히 전문가의 고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업들이다. 이런 사업이 타 시도의 운영 선례가 있다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진정으로 먼 미래를 내다본 사업이라면 그 사업 자체에 충실해야 한다. 여타의 구질구질한 문제로 본의가 전도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번에 거제시에서는 270억원을 투자하여 갯벌을 복원한다. 벌써 시중에는 이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전문가의 의견을 듣지 않고 선정함으로써 먼저 이루어져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곳이 뒤로 밀리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계획을 세우면서 전문가의 의견을 충실히 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일이다. 복원 대상지의 선정과 방법 모색에는 전문가의 의견을 귀담아 듣고, 그 뒤의 진행은 관에서 박력 있게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97억원을 투자하여 금년 말 완공 개관하게 되는 거제사회복지관의 운영 문제도 전문가들의 고견을 충분히 듣고 그 바탕 아래 일이 추진된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세심한 연구와 계획이 없이 단순 처리했다가 낭패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다시 한번 이 지점에 와서 모든 일은 전문가의 고견을 들어서 해로울 일이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경당문노의 정신을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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