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들판의 여기저기에 피어나는 가을꽃들이 가는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아무 것도 없는 줄 알았던 풀숲에서 언제 저렇게 애처롭고 가냘픈 꽃을 키워냈나 경이롭다. 애잔하게 사람의 눈을 잡아끌기에 충분하다. 여기저기 한 송이씩 올라오는 야생화를 보면서 자연의 순리에 다시 한번 고개 숙이게 된다.

돌아오는 길에 야생화 화원에 들렀다. 사람의 손길로 키워진 꽃들이 제 자랑에 바쁘다. 들판에 피어 있던 꽃과는 다르게 무더기로 앉아서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이 대단하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마음에 욕심이 생긴다. 나도 한번 야생화를 기르는 대열에 서 보고 싶다. 그리고 야생화를 키워놓고 함께 그들과 대화하면서 가을밤을 밝혀보고도 싶다. 꽃들이 모여 있으니, 그들의 존재가 더 확연히 드러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서재의 창가에 앉아 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야생화 화원에서 바라보았던 꽃들의 모습이 세세하게 나타나질 않는다.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는 기억은 분명 있는데, 꽃의 낱내의 모습은 떠오르질 않는다. 너무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일까.
좀 전에 보고 온 바위구절초, 산씀바귀, 개미취의 모습이 흐릿한 시야에서 초점을 잃고 뱅뱅 돈다. 한번 떠올려 보려 해도 결코 내게로 와 주지 않고, 내 눈 앞에서 군무나 하듯 어지럽다. 하지만 들판에서 본 왕고들빼기, 해국, 물봉선, 금불초 등은 다르다. 단아한 왕고들빼기, 연한 자주색의 해국, 물가에서 모여 있던 물봉선, 나비가 앉아 있던 금불초가 확실한 모습으로 내 기억에서 살아난다.

새삼스럽게 자연의 이치가 무섭도록 가슴에 와 닿는 순간이다. 이 자연의 가르침을 감히 인간이 거슬리려는 데에 문제가 야기되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인간의 힘으로 아니 될 것이 없고, 계획만 치밀하면 다 될 것으로 알았던 나의 아집이 무참히 무너지는 아픔을 겪는다.

가을이 되면 사람들의 마음에도 열매 맺음에 대한 즐거움을 한데 모아 만끽하고자 하는 욕구가 치밀게 되듯이, 어떠한 것이든 공동의 관심을 한데 모아 의미를 극대화하고 한마음 한뜻이 되고자 하는 어울 마당을 갖고자 한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축제 문화이다. 크게는 대륙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는 축제도 있겠고, 나라 안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축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대부분 지방 정부 단위로 움직이는 축제가 많고, 더 나아가서는 작은 축제도 여러 개씩 가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당연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지나친 사람의 욕심이 가미되어 본래의 취지를 어긋나게 한다는 데에 있다. 국가적이거나 지방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축제는 당연히 관에서 관심을 가지고 추진되어야 할 일이겠지만, 동네의 조그마한 것들까지도 관과 연을 대어 실행하려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동네의 축제는 자생적 의미를 살려 자연스럽게 자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좋다. 그래야 그 나름의 의미가 있어 단합과 화합의 효과가 있고, 독창성을 유지되게 된다. 축제를 하기 위해 관에서 지원금을 많이 받아오는 것이 능력 있고, 모든 일은 성대해야만 된다는 의식도 어찌 보면 과시적인 체면문화이다. 여기에는 상호 필요에 의해 목적을 달성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관에서는 표보다는 지역의 장래를 헤아리는 냉정한 선택이 요구된다.

축제는 일회성인 것은 관에서 주도해야겠지만, 연례행사로 치러지는 것은 민에서 주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리고 지역민들의 조그마한 축제는 자체적으로 진행하고, 지방정부 차원의 것도 민 위주로 하되, 그 개수를 적절하게 조절하여 시너지 효과가 크도록 배려해야 한다. 지역민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는 것만이 최선의 길은 아니다. 지역민들의 요구를 하나로 뭉치면서도 지역의 미래를 내다보는 정신적 지표가 될 만한 축제, 그러면서도 타 지역과 차별화할 수 있는 축제, 그것을 찾아나서야 한다. 여러 개의 축제로 예산을 나누어 대동소이한 축제를 만들 것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 오직 하나뿐인 유일한 축제를 만들겠다는 각오라면, 그 축제는 생명이 길고 타 지역에서 흉내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지역의 특성과 유기적으로 결속되어야 더 효과가 클 것이다. 가령 거제에서는 다른 곳과 달라서 충무공의 승전지에 조선 산업이 크게 발달한 곳이기에 ‘조선축제’ 같은 것을 생각해 볼만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가을에 가을 들판에 핀 야생화가 제 홀로 자생했기에 그 처연한 모습으로 우리의 눈을 잡아끌고, 사람의 손길로 잘 다듬어진 화원 안의 꽃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야생화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터득한다. 이러한 자연의 가르침을 이 가을에 가슴에 받아들이며, 사람들의 꽃은 어떻게 피어나야 할까 가늠해 본다. 참 슬기로운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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