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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지 영
/수필가
양초의 뜻이 광장에서 뜨겁게 타고 있던 날, 태평양을 건너갔다. '한국을 잘 지키고 있어라'는 나의 너스레에 지인이 응수했다. '부시 만나 협상 잘하고 와라'. 볼 일 다 본 며칠 뒤에 나는 드디어 워싱턴 DC에 도착했다.
드넓은 녹색 공원지대에서 돋보이는 화이트 하우스(White House), 이 백악관은 6개월 전부터 예약하지 않아 내부 관람은 불가능하다는 귀띔이 있었지만 굳이 건축의 내부 실정까지 볼 욕심은 없었다. 고색창연한 박물관·기념관 그리고 연방정부 청사를 안고 있느니 만큼 글로벌 시대의 관광지 차원에서 외국인이 한 번쯤은 구경해 볼만한 곳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다른 건물들은 대통령 관저보다 높게 지을 수 없다는 법적 규제와 통제 아래에서, 친환경적인 관리와 주변의 유서 깊은 건축들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내셔널 캐피털 공원의 나무 그늘에 앉아 나는 화면 속에서 보아오던 미국의 중심부를 조망하고 있었다.
발 아래로 무엇이 지나갔다. 떠나올 때 던진 지인의 서글픈 농담을 떠올리며, 한국의 백 배가 되는 그 나라 면적을 상상하면서 유난히 더운 기온을 손부채로 쫒고 있을 때였다. '청설모’였다. 나무와 잔디밭 사이로 오르내리다 내 두 다리 사이로 쏜살같이 빠져나간 것이다. 그까짓 기척에 기겁을 하는 인간이 우습다는 듯 도처에서 뛰어다니는 녀석들 중 한 놈이 태연히 1미터 전방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다. 옆 사람이 과자를 던져주자 잽싸게 받아 입에 넣었다. 그러면서 이쪽 태도를 연신 살피기에 바빴다. 토끼만한 덩치가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간식 양과 그 단맛에 길들여졌음을 입증해 주었다. 그때서야 녀석의 행동을 눈치 챈 나도 견과 한 알을 던져 주었다. 녀석은 아몬드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또다른 사람들을 흘끔거렸다.
청설모는 초식만 하는 다람쥐와는 달리 풀·과일·잣·도토리·밤·동물의 알(뱀 알)은 물론이고 개구리 등, 초·육식을 다하는 잡식성이다.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새들이 나무 위에다 둥지를 틀고 낳은 알과 새끼들을 더 좋아한다. 삼동에도 겨울잠을 자지 않고 눈밭을 헤치며 먹이를 찾는다. 우리 땅에서는 본토박이 다람쥐를 숲에서 쫒아내고 있다는 힘센 녀석, 놈은 대국에서 기가 산 모양으로 아예 사람 손에 든 것까지 먹어치운다. 쓰다듬어도 가만있다. 비만해진 청설모의 몸피와 그 왕성한 식성이 나에게 문득 한 기사를 연상시켜 주었다.
“개방의 상징인 미국, 더구나 수도 워싱턴인데 이래서야 되나?”
이 한마디는 지난해 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7차 협상 당시에 뉴욕 특파원 기자가 쓴 글 중 한 줄이다. 회담장소가 워싱턴 인근의 호텔이었는데, 그날 한국 기자단이 브리핑룸으로 컵라면 등을 반입하려 했던 모양이다. 이것을 호텔측에서 금지시켰다. 그러자 우리측 일부 공무원과 기자들이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모두(冒頭)를 이렇게 시작했던 것이다. 국가경제 보다 가정경제가 우선이던 나의 기억 속에 아직도 그 내용이 선명한 이유는 ‘그 장면은 한국 기자들로 하여금 미국의 협상 태도를 연상케 했다’는 요지에 절감했기 때문이다.
기실 자유무역을 외치면서도 자국한테 불리한 것은 철저히 닫아온 나라, 그들은 자국이 만들어 둔 틀에 한국이 몸을 맞추라는 식이 아니던가.
백악관 뜰은 멋과 효용가치를 겸비하고 있었다. 역사·문화·유적 등을 관리하고 보호하며 증진을 염두에 둔 자연환경이 돋보이고 청소년 프로그램 등을 통하여 후손들에게 애국심을 끊임없이 고양시키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방객과 동물에게도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는, 그 완벽한 시스템을 갖춘 공원에서 며칠 동안 잊고 있었던 고국의 실상을 새삼 떠올렸다. 상부와 민중 간에 괴리감이 깊어지면서 날만 세면 반목하는 조국, 그 기저의 중심에 미국이 있다. 한미(韓美) 관계의 표(表:푸른 조화)와 리(裏:약육강식이 미화된 능력주의로 불리어지면서 엄연한 약육강식이 자행되고 있는)의 부조화가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청설모에게 조금 남은 땅콩마저 다 던져주고 있었다.
이동열 skj633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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