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경 근
/고려대 명예교수

죽은 사람이 산사람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있다. 죽은 사람이 남긴 값진 문화유산 덕분에 후손들이 자긍심을 갖고 여유 있게 사는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다. ‘죽은 진시황제가 오늘날 중국 사람을 먹여 살린다...’, ‘죽은 모차르트가 오늘날 오스트리아 국민을 먹여 살린다...’라는 말이 이에 해당된다.

이와는 반대로 죽은 사람이 산사람을 못살도록 괴롭힌다는 말도 있다. 유산은 커녕 대물림 받은 빈곤과 불명예와 폐해 때문에 산사람이 자괴감에 빠져 고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다.

김일성 공산집단이 반세기 동안에 남긴 수치스러운 ‘불멸의 위대한 업적’ 때문에 우리 민족의 절반이 빌어먹는 신세로 전락해 세계의 조롱거리가 된 현실이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우리가 거지 떼가 되는 일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고 발생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거제는 비록 위대하고 찬란한 문화유산을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다행히도 하늘이 내려준 보석과 같은 자연유산을 간직한 복 받은 지역이다. 아무리 값진 천혜의 유산이라도 이를 가꾸고 보존하고 인간의 행복추구를 위한 목적에 활용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거제사람들이 후대에 산사람을 먹여 살리는 존경받는 죽은 사람으로 평가받을지 아니면 못살도록 괴롭히는 못난 죽은 사람으로 비난받을지는 현재 산사람들이 하기에 달렸다.

문화는 생성되고 소멸되는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 한다. 요즘은 유형문화의 일종인 새로운 개념의 도시문화 창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도시문화의 역사는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예전의 도시문화는 웅장함과 종교적 정치적 의미에 비중을 두었던 반면에 현대적 도시문화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인간중심적인 삶의 공간을 창조하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다.

스위스의 취리히와 덴마크의 코펜하겐은 최근에 가장 성공적인 도시문화를 창조한 도시로 선정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고 가장 아름답고 한 번은 반드시 가보고 싶은 도시로 뽑힌 것이다. 원래 험난한 알프스 산중에 그리고 척박한 북유럽 해안가에 위치해서 활용가치가 별로 없었던 이들 도시는 웅장한 건축물이나 불가사의한 구조물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세계인들의 관심을 끌고 찬사를 받는 이유는 철저하게 인간중심적인 삶의 공간으로 건설하고 관리하여 후손에게 물려줄 하나의 작품으로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성공비결을 다시 요약하면 간단하다. 자연과 환경에 대한 훼손을 극소화하고 인간의 삶의 질 향상에 대한 배려를 극대화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거제는 이런 도시들과 비교조차 안 될 정도의 유리한 조건들을 두루 갖춘 복 받은 지역이며 조금만 노력하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살기 좋고 모든 사람들이 한 번은 반드시 가보고 싶어 하는 도시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요즘 거제에서는 산을 뚫고 바다를 가로질러 도로를 건설하고 관광자원을 개발하고 산을 들어내서 바다에 인공 섬을 조성하고 산업단지와 집터를 닦는 일들이 진행되고 계획중이다. 그 수는 무려 50여개가 넘는다고 한다. 거제 전체가 공사판으로 바뀌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이긴 하지만 이들 사업들 가운데 과연 몇 개나 인간중심적으로 계획되고 진행되고 있는지, 실적위주 건수위주 눈가림식의 사업들은 없는지, 있다면 묵인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등을 차분하고 엄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지금도 장승포 신현 옥포 등과 같은 지역에는 제대로 깔리고 설치된 보도블럭이나 맨홀뚜껑을 찾아보기 힘들고 엉터리 교통 표지판들이 거제의 도로변을 버젓이 점령하고 있고 난개발 현장이 도처에서 목격된다. 습관적으로 반대를 위한 반대를 외치는 일부주민과 비열하게 뒤에서 이들을 선동하는 세력에도 원인이 있기도 하지만 해당 주민들의 이유 있는 불만과 분노가 끊이지 않고 시민의 소득수준과 기대와는 거리가 먼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대로 흘려버리거나 외면할 수 없고 반드시 시정되어야할 내용들이 많은 것 같다. 무관심과 부실과 부패는 보물을 쓰레기로 만들뿐만이 아니라 훗날 비극을 자초하는 불씨가 된다.

거제가 가까운 장래에 수천 수백 년 동안 길이 남을 불가사의하고 인류문명에 크나큰 영향을 줄만한 문화유산을 남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럴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 취리히나 코펜하겐과 같은 작지만 알차고 값진 인간중심적 도시문화를 창조하여 후대에 소중한 유산으로 물려주는 일에 관심을 돌려야 할 것이다.

거제는 정성어린 손길과 탁월한 기획이 작은 외딴 섬과 잊혀 질 번한 역사적 장소를 한 번 가보고 체험하고 싶은 명소로 만든 성공사례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한 바 있다. 문화 창조는 정해진 기한이 따로 없다. 시작은 절반의 성공이라는 신념을 갖고 모든 시민은 선출직 임명직 공직자들을 앞세워서 인간중심적인 도시문화 창조에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죽은 거제사람이 산사람을 먹여 살린다’ 하면 마치 방송연속극 전설의 고향의 한 제목 같기도 하지만 반드시 실현되는 거제의 미래 모습이기를 바란다.

전의승  skj633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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