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영 천
/거제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장

우리 모두의 자식이나, 조카, 손자 같았던 초등생 혜진이와 예슬이가 실종된지 80여일만에 끝내 주검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같은 동네 어른에게 어린 육신이 무참히 난도질 당해 내 버려진 채로. 껍데기만 사람일뿐 짐승만도 못한 30대 용의자의 행동은 인간 악행(惡行)의 극치를 보는것 같아 치가 떨릴 뿐이다. 반성은 커녕, 결정적 증거가 속속 드러나는데도 허무맹랑한 변명과 거짓으로 횡설수설하는 모습에 오로지 경악할 따름이다. 아직 범죄가 최종 확정되지 않았지만 잔혹한 범행수법과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을 두고 벌써부터 범죄전문가들은 '싸이코패스'에 의한 아동살인사건으로 진단하고 있다.

싸이코패스(Psychopath)란 용어가 세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생각보다 오래전이다. 1920년대 독일에서 발생한 엽기적 연쇄살인사건의 추적과정에서 정신분석학자인 슈나이더는 광신(狂信), 폭발적 성격, 자기현시, 지나친 발정(發情)등 10가지 인간의 특징을 싸이코패스에 속하는 인격 유형으로 규정하였다. 겉모습은 멀쩡해도 아무 이유 없이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정신병질적 성격 장애자를 말한다.

흔히 우리가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빗대 '싸이코'라 하는데 이런 성격은 주로 기질적, 환경적 요인에 의해 형성된다고 한다. 대개 일반적인 사회규범을 내면화 하지 못하고 흉악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보통사람에 비해 월등히 높다. 더욱이 이런 정신병질의 주요 증상인 '지나친 달변이나 떠벌림', '병리적 거짓말', '과대망상적 자존심', '난잡한 성적(性的) 행동' 등은 일반인이 얼핏 발견하기 매우 어렵다. 범죄자 스스로 사회생활을 하는데 다소 불편을 겪을 뿐, 평소엔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어느날 조용하게 살던 평범한 이웃이나, 겉으론 멀쩡하고 잘 나가던 유명인이 전혀 납득할 수 없는 파렴치한 행동으로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는 경우도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된다.

엽기적이고 끔찍한 범죄를 수없이 겪은 선진국에서는 일찍부터 '싸이코패스'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함께 꾸준히 예방대책을 마련하여 왔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2004년 여성과 노약자 21명을 연쇄살해하여 온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유영철 사건부터 겨우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잘 알려진 1980년대 화성연쇄살인사건부터 경기 서남부권 연쇄살인사건, 속칭 '발바리'에 의한 연쇄성폭행사건과 작년에 전남 보성의 평범한 70대 노인이 여대생 등 여행객을 상대로 저지른 연쇄살인사건까지 유사한 싸이코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지만 그때마다 요란하게 떠들기만 할 뿐, 본격적인 연구나 체계적 범죄예방책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이번 사건 역시 당국의 안이한 초기 대응이 여론의 따가운 질책을 받고 있다.
만만한 경찰만 수십일간 죽어라 수사하고도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 형국이다. 범죄자의 인권을 유린하자는 것도 아닌데 피해를 줄여보자는 수사기관의 노력은 번번이 무산되어 왔다.

그렇다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진 정부나 정치권은 그동안 강력범죄 예방을 위해 뭐했는가! 사회 이목이 집중된 사건이 터지면 호들갑만 떨게 아니라 통렬한 반성이 선행된 대책을 내놔야 한다. 3범 이상의 범죄전력자를 상대로 한 '유전자 정보은행'의 조속한 설치나, 강력범이나 성폭력범에 대한 전자팔찌 착용 및 주거 외출 제한 제도, 이웃경고제 등 보다 효과적인 예방책은 늘 정치권에서 방기(放棄)되어 왔다. 결국 모두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시늉만 하다가 또 억울한 희생을 불러온 셈이다. 범죄예방이 결코 정치이념적, 권력적 타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필자는 재작년 이맘때 이 란을 통하여 4회 연속 '싸이코패스에 의한 무동기범죄'의 심각성을 그 대응책과 함께 자세하게 설명한 바 있다. 당시 일부 독자는 무슨 생뚱맞고 이상한 글을 지역신문에 쓰느냐고 힐난을 하기도 했다. 거듭 강조하지만, '싸이코패스'에 의한 무동기성 강력범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내 주변이나 이웃 어디에서든 갑자기 발생할 수 있다. 앞으로도 이 범죄는 계층간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사회적 갈등이 커질수록 더욱 확산될 것이다.

누구나 험한 세상을 온전하게 살아갈려면 지혜와 슬기가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싸이코패스'의 살아있는 망령들은 유유히 범행대상을 탐색하고 그 기회를 엿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밤바람 한번 쐬러 나가기 겁나고, 마누라와 아이들이 잠시 안 보여도 가슴 철렁하는 무서운 세상이다. 무엇보다도 나와 내가족의 안전을 경찰이나 국가가 완전히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전의승  skj633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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