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순 련
/신현초등학교 교사

학생들의 첫 출발은 3월이다.
졸업식, 종업식과 함께 시작되는 3월은 학생들의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첫 출발이다.
이 첫 출발의 3월이 되면 담임선생님은 학생들의 1년을 위하여 다양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달성하기 위하여 학생들에게도 자신에게 맞는 1년의 계획을 만들어 보게 한다.

이 시간이 되면 학생들은 참으로 다양한 목표를 내세운다. 숙제를 절대 미루지 않겠다는 녀석, 매일 일기를 쓰겠다고 다부진 약속을 하는 녀석, 그리고 줄넘기를 매일 100번씩 하겠다는 녀석 등 다양한 계획이 나오고 있다. 어른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계획들이지만 학생들은 그 계획을 하는 순간만은 모두들 1년 동안 그 약속을 잘 지켜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리라는 다짐만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학생들이 정한 자신과의 계획이 몇 개월이 가기 전에 모두 허물어져 버리는 데 있다. 이렇게 3월초에 정해놓은 자신과의 목표를 지키지 못하는 까닭은 교사의 지속적인 지도가 허술한 탓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과의 약속을 예사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라면 상대방과의 약속 이행을 위해서라도 지키려고 노력을 하겠지만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 자신과의 약속은 여간해서 지켜내기가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

설을 넘긴 지 사흘 쯤 지났을 때, 목소리가 근사한 한 청년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이름을 밝힌 바에 의하면 21년 전 4학년을 담임했을 때의 제자인 인성이었는데, 나이를 계산해 보니 올해 아마 서른 둘 정도의 건장한 청년이 되었을 것 같았다. 만날 약속을 하고, 그 시절을 떠올려보니 제일 먼저 내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것이 바로 인성이의 생활계획표 사건이었다.

그 해도 4학년을 맡고 난 후 내가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바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생활계획표 만들기였다. 학생들은 시간에 맞게 공부 시간을 정하고, 노는 시간을 정하면서 생활계획표를 만들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공부시간, 쉬는 시간, 그리고 학원가는 시간을 지키는 것으로 생활계획표가 짜여져 있었다. 그런데 인성이의 생활계획표는 달랐다. 인성이의 생활계획표에는 공부시간, 식사시간, 학원시간이 정해 있는 것이 아니고, 매일 아침 자신이 꼭 해야 할 약속이 3가지만 적혀있었다.

그 3가지 약속은 새벽 5시에 일어나기, 매일 동네 한 바퀴 돌기, 매일 1시간씩 책읽기였다. 생활계획표를 다 만든 후 전시를 하자 친구들은 인성이의 아주 간단한 계획표를 보고 킬킬거리며 이것은 생활계획표가 아니고, 그냥 약속 지키기가 아니냐며 놀리기 시작했다.

내 자신도 우리 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인성이의 생활계획표가 다소 예외라서 과제로 다시 해 오라고 충고해 주고 다음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인성이는 절대 새로 해 오는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그 3가지 지킬 일을 국어공책에다 붙여놓고 매일 매일 ○과 ×로 표시를 해 나가고 있었다.

우리 반 모든 학생들의 생활계획표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잊혀 질 때 쯤 되어도 인성이의 3가지 지킬 일에 ○ × 표하기는 절대 미루는 일이 없었다. 인성이의 일기장엔 이젠 새벽 5시에 일어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고, 매일 책 읽기는 1시간에서 2시간으로 실천하게 되었고, 동네 한 바퀴는 3바퀴로 되어 할아버지와 함께 잘 지켜나간다는 것을 알게 될 때쯤 우리는 한 학년을 마쳐서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종업식 날 아이들을 데리고 양지바른 곳에 앉아서 선생님과 함께 공부한 것 중에서 무엇이 제일 기억에 남느냐고 물었더니 인성이가 벌떡 일어나 3가지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도와준 선생님이 제일 인상에 남았다고 하여 나는 내 얼굴이 붉어짐에 정말 혼이 났다. 나는 한 번도 그 아이의 3가지 약속 지키기에 도움을 준 적이 없었고 단지 그 아이의 ○ × 가 기록된 곳에 확인표시만 해 준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헤어진 인성이가 21년 만에 나를 찾게 된 것이다.
그는 근사한 청년이 되어있었다. 일류대학을 나와 첨단의 제약회사에서 하던 일을 중단하고 영국으로 다시 공부를 하러 떠나기 전 선생님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내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인성이가 먼저 말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많은 선생님을 만나서 공부하는 동안 3가지 고치기 어려운 습관을 고치게 해 준 4학년 때의 선생님이 제일 기억에 남더라는 이야기였다. 4학년 첫날에 만든 생활계획표 때문에 늦잠꾸러기에서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을 배웠고, 매일 2시간 이상 책을 읽게 되었으며, 아침마다 운동을 하게 된 가장 좋은 습관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습관은 어른이 되어서도 언제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어 앞으로도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3월이다.
많은 학생들이 첫출발 선상에 서 있다.
나름대로의 1년 계획을 세워놓고 멋진 학생이 되기 위한 꿈을 안고 출발하는 학생들에게 우린 어떤 도움을 주어야할까? 세상에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약속은 자신과의 약속이며, 내 자녀가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켜나가는지 확인만 해 주어도 변화할 수 있는 것이 우리 학생들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전의승  skj633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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