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근
/고려대 명예교수·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이사장

이번 주 월요일에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은 작년 12월 19일 대선 결과가 발표된 직후에 밝힌 국정구상에서 국민에 군림하지 않고 섬기는 CEO형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취임사에서도 같은 말을 하면서 모든 공직자들은 민생복리 증진을 위해 현장을 발로 누비는 공복이 되어줄 것을 당부했다.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에는 힘든 약속이고 당부인 것 같다. 공직사회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국민을 섬기고 현장에서 민생중심의 행정을 펴나갈 각오를 다짐했으면 그의 지휘체계에 속해 있는 모든 공직자들도 그 뜻에 동감하고 동참하는 의지와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법치국가는 시민의 준법정신뿐만이 아니라 공직자의 윤리의식과 복무 자세에 의해서도 그 성패가 결정된다. 우리사회도 지방자치제가 정착되면서 공직분야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군림하려하고 요령을 피우고 책임을 회피하고 무사안일에 빠지고 행정편의 중심으로 일을 처리하려는 악습과 구태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시민에게 엄청난 불편을 주는 전봇대 몇 개도 옮기려 들지 않는 철밥통을 대통령이 앞장서서 깨겠다고 나설 정도로 심각한 상태다.

이런 공직자들 때문에 시민은 큰 불편을 격어야 하고 불행해지고 나아가서 사회와 국가는 병이 든다. 나도 이런 공직자 때문에 피해를 본 경험이 있다. 한국이 아니고 독일에서의 일이다.
나는 원래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기독교인으로 자랐다. 부모형제는 물론 가깝고 먼 친인척들도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는 주일학교 반사로 청년시절에는 서울의 큰 교회에서 청년회 회장과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신앙생활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처자식들도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기독교가 싫어서가 아니다. 40년 전에 독일 교회의 목사와 세무공무원 그리고 나 사이에 벌어졌던 사소한 일 때문이다.

나는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몇 년 동안은 독일 교회에 나가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독일 정부의 장학금은 학생신분 유지와 기초생활에 필요한 정도만 지급되었기 때문에 여행도 다니고 필요한 물건도 사려면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낮에는 강의실과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밤에는 청소 아르바이트를 했다. 힘들었지만 수입이 조금씩 늘어나는 재미에 이 일을 계속했다.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성직자는 국가에 의해 신분이 보장된다.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이라도 체류서류에 기독교인이라고 기재하면 종교세를 납부해야 한다. 그래서 목사와 신부는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는 공무원 신분으로 활동한다. 독일이 바로 이런 나라에 속한다.
나는 세무서를 찾아가서 먼 동양에서 온 가난한 유학생의 아르바이트 수입에까지 종교세를 부과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이니 이를 면제해달라고 간청했다. 담당 공무원은 '목사님과 의논 하세요!'라는 차갑고 불친절한 말 한 마디로 민원상담을 끝냈다. 그래서 나는 목사님을 찾아가 어렵게 사정을 해 보았지만 목사님은 세무공무원보다 더 간결하고 확실한 방법을 알려주었다. '세금 내기 싫으면 기독교에서 탈퇴하세요!' 라고 하면서 서식 한 장을 내 밀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목사님의 권유대로 거기에 서명했다. 그 이후로 종교세는 부과되지 않았다. 교회에서 탈퇴하겠다고 서명을 한 나는 양심상 다시 교회 문턱을 밟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모태신앙인인 나는 한 순간에 비 신앙인이 되어버렸다.

당시 세무공무원과 목사님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권위주의와 관료주의로 무장된 전형적인 독일 철밥통 공무원이었다. 만일 그 때 목사님이 공무원 신분이 아니고 낮은 자세로 인간의 영적 삶을 보살피고 고객을 왕으로 모시는 CEO형 영적 지도자였다면 나는 지금도 신앙생활을 계속하면서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40여 년 전에 있었던 어리석고 옹졸했던 처신을 후회면서 다른 한 편으로 당시 독일 철밥통 목사를 깊이 원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섬기는 일이 직업인 사람, 그것도 소명감이나 사명감에 충실해야 할 공직자의 미숙한 언행과 일처리가 개인이나 사회에 얼마나 큰 상처와 피해를 안겨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의 국정운영구상과 그가 속한 정당의 정책기조는 최소한 5년 동안 우리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주는 시대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시대정신과 목표는 국민을 섬기고 경제 강국으로 향하는 제2의 도약인 것이다. 대통령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거제시의 모든 공직자들만큼은 시민을 섬기는 CEO가 되어서 민의와 민생을 외면하면서 시민에 군림하는 철밥통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해주기 바란다.

섬김을 받는 시민은 받은 만큼 공직자에게 온정과 격려로 보답할 것이다. 아울러 작고 효율적인 중앙정부지향은 반대로 큰 지방자치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는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전의승  skj633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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