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덕 규
/거제대학장

매년 우리 거제시와 미국 조지아주(洲) 애틀랜타시(市)를 번가라 가며 개최되는 민주평화통일 자매(姉妹)협의회 합동세미나가 올해는 애틀랜타시에서 열렸다. 지난 4월12일(현지시간) 그곳에 도착한 우리 거제시 자문위원단 일행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북한 핵과 최근의 남북관계」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성공리에 마쳤다. 그 후 본인은 일행과 헤어져 독자적인 일정으로 16일 아침에는 노스캐로라이나주(洲) 채플힐시(市)에 있는 노스캐로라이나대학과 듀크대학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 시간에 끔찍했던 버지니아공대 총격사건이 일어났고 나는 지척(咫尺)에서 그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때쯤에는 한 미국지방신문에서 범인은 동양인이며 중국계일 가능성이 짙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17일 오전에 공식적으로 발표된 사건의 전말(顚末)은 달랐다. 자살한 범인 이외에 무려 32명의 교수와 학생들이 사망하고 그보다 많은 사람이 상해(傷害)를 입은 대량살상 총격사건의 범인이 한국인 학생이라는 것이었다. 다음날에는 그가 버지니아공대 기숙사에서 오전 7시를 좀 지나 첫 번째 범행을 저지른 후, 9시를 넘겨 두 번째 범행을 할 때까지 2시간에 가까운 공백시간의 행적과 첫 총격 후에 즉각 대처하지 못한 캠퍼스경찰의 대응조치가 미흡했다는 추궁이 이어졌다.

결국 미궁에 싸였던 그의 범행 당시 행적은 미리 준비한 방송매체용 성명서(Multimedia Manifesto)및 사진 등, 영상자료를 NBC방송국에 우편으로 발송하는데 걸린 시간이었음이 밝혀졌다.
여하튼 범인은 8세에 미국에 이민 가서 13년여 동안 미국에 살며 공부해온 미국인이지만 아직도 영주권만 보유한 한국국적의 우리 동포였다. 그리고 국적이야 어떠하던 그는 분명 우리민족의 피를 타고난 우리 형제 중에 한명이다. 그가 이국땅에서 겪었을 고뇌와 좌절을 이해하기 전에 사건은 말할 수 없이 끔찍한 상황이었고, 수년전 L.A.폭동에서 보인 것과 같은 걷잡을 수 없는 인종갈등 사태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개연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현지에서 사건발생으로부터 이를 처리하고 마무리해 가는 미국 정부당국, 경찰, 언론, 학교의 일치된 처리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미국사회의 선진의식과 미국인들의 실천행동에 무서운 면이 있음을 실감하고 우리도 배워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건발생 3일째 되는 날 나는 범인의 부모가 살고 있는 워싱톤 D.C. 근처의 아난대일(Annandale)시를 방문하였다. 그곳은 버지니아주(洲)에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훼어홱스카운티(Fairfax Co.)에 속하는 곳이다.

북버지니아대학에서 일을 마치고 그 지역의 우리 교포 몇 사람을 만났다. 한결같이 길을 다닐 때도 슈퍼마켓에 갔을 때도 자격지심에 자꾸 주위를 둘러보게 되더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모두 조용하고 침착하게 속으로 삭이는 듯했다. 내 자식을 살려내라고 울부짖는 부모도 멱살잡고 화풀이하려는 형제자매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슬픔을 삼키는 모습들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처음 열린 추모행사에는 부시 대통령도 직접 참석하고 일주일간 조기(弔旗)가 걸렸다. 버지니아공대 교정인 드릴필드(Drillfield) 잔디밭에는 범인 것까지 포함한 라임스톤 33개위에 꽃송이들이 놓였다.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촛불집회가 교정에서 있었고, 백악관에서는 한인2세 버지니아공대대표의 기도회도 열렸다. 한국인 범인을 비난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총기소유를 허용하는 제도적 문제와 범죄 가능성이 있는 정신적 장애자들의 허술한 관리에 집중적으로 더 강한 비평이 가해졌다. 첫 발표 이후에는 어느 언론매체도 어떤 사회단체도 범인이 한국인이라고 비난하거나 언급하는 일조차 들을 수 없었다.

이제 버지니아공대도 서서히 사건의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캠퍼스 폐쇄도 풀리고 취소됐던 운동경기도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단됐다 다시 열린 마이아미대학과의 야구경기에서 지기는 했더라도 함성 Hokie!(버지니아공대의 응원함성)가 조용히 울려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인내와 침착함에 박수를 보낸다. Hokie! Hokie! Hokie!
우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상호 처한 입장이 다르고 해도 같은 사건을 놓고 바라보는 미 국민과 우리 국민 사이에 현격한 시각과 대처의식의 차이가 있음을 느낀다. 단순히 미국이라는 나라가 다민족사회로 구성됐기 때문에 자위책으로 해야 할 당연한 행위라고 넘겨버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동열  skj633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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