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영 천
/거제경찰서 교통조사계장

춘삼월인데도 영하로 뚝 떨어진 날씨 때문에 잔뜩 움추려 있던 며칠전 오후, 남루하고 꾀죄죄한 차림의 50대 남자가 온 몸이 포박된 채 조사관에 이끌려 사무실로 들어왔다. 간밤을 유치장에서 보낸 탓인지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평소 인정많은 담당조사관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필자에게 그를 체포한 이유를 설명 했다. 그는 무면허로 교통사고를 내고 음주측정까지 거부한데다가 벌금을 내지 못해 수배중이었다. 마땅히 연락할 곳이나 가족도 없다고 했다.그때 사무실에 있던 다른 조사관들이 " 아제 또 왔소 !"라며 여기 저기서 탄식을 해댔다.그는 예전에도 음주운전으로 경찰서와 몇번 인연을 맺은 적이 있어 조사를 담당했던 직원들에게 낯익은 인물이었다. 조사 받는 내내 머리를 숙인채 거듭된 추궁에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하도 측은해 보여 잠시 쉬는 틈에 담배 한개비를 건네며 사연을 넌즈시 물어보았다. 고향에서 고교를 졸업후 20년간 직장생활을 하다 그만두고 인근 도시에서 소규모 납품업을 하여 제법 돈도 벌었다고 한다. 그런데 즐겨 마시던 술이 화근이었다. 납품용 화물차를 음주운전하다 벌금을 몇번 낼 때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음주운전으로 사망사고를 내면서 그의 인생은 뒤바뀌기 시작했다. 결국 구속이 되었고 곧 이은 IMF 사태로 잘 나가던 사업과 단란했던 가정은 이내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몇년만에 출소한 그는 재기를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허사였다. 계속된 방황과 술은 그때마다 또 음주운전으로 이어졌고 감옥도 몇번을 더 드나들었다. 벌금 낼 형편이 못돼 수배가 되었고 붙들리면 여지없이 감옥으로 보내져 노역을 하기 일쑤였다. 그 와중에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식당을 나가던 아내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가출해 버렸고, 하나뿐인 딸도 그와 아예 소식을 끊어 버렸다. 마땅한 거처도 없고 막 노동으로 하루하루 먹고 살다보니 몸도 마음도 망가지는 건 당연지사. 알콜성 간질환과 당뇨병이 찾아왔다. 작년 봄 음주 뺑소니사고를 내고 구속되었다가 출소한지 채 두달도 안돼 또 이번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차가운 수갑을 찬 채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연거푸 빨아 대던 그가 이렇게 말했다. "사실, 제가 왜 음주운전을 자꾸 하는지 저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술이 깨면 아무 생각이 안 납니다. 술만 마시면 이젠 습관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라고. 그의 인생은 한마디로 음주운전때문에 패가망신(敗家亡身)한 것이었다. 조사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가는 그의 야위고 구부정한 뒷모습이 더 없이 애처로워 보였다. 그날 밤 늦게 구속영장이 발부된 그는 또 다시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영어(囹圄)의 몸이 되고 말았다.

지난 연말부터 올해 1월까지 두달간 우리 거제지역에서 음주운전으로 단속된 운전자가 무려 620여명에 달한다. 도내 각 시군을 관할하는 22개 경찰서 중 30만 인구를 관할하는 마산동부서를 빼고 두번째이며, 전국의 대도시를 포함해서 10위권 수준일 정도로 음주운전자가 많았다. 이는 작년 같은 기간의 두배가 넘는 수치이다. 대여섯명은 술 마시고 운전하는 버릇 못 고쳐 결국 감옥 신세까지 졌다. 비교적 음주가 많은 연말연시를 맞아 매년 실시하는 단속이었는데도 이렇게 많은 시민이 음주운전으로 적발되었다는 건 결코 그냥 넘길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단언컨대, 음주운전은 실수가 아니다. 음주운전 자체도 위법이지만, 어떻게 보면 불특정인에 대한 미필적 고의의 살인미수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음주운전자 자신이 패가망신 하는 건 당연하지만, 결과적으로 무고한 남의 가정까지 파탄지경에 빠뜨리는 파렴치 범죄 못지 않은 것이다. 사고 안나면 다행이고 혹 사고를 내거나 단속 당하면 더럽게 재수가 없다고 여긴다. 음주운전이 근절되지 않는 주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개인의 잘못된 음주습관과 음주운전에 비교적 관대한 사회 풍토 탓이다. 당국 또한 음주운전사범에 대한 사면 남발이 사고불감증을 부추기는데 일조(一助) 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지난 연초부터 우리 지역 길거리 곳곳에서 "살기좋은 10대 도시 선정 "이니," 무슨 무슨상 수상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 문구를 한동안 심심찮게 보았을 것이다. 장한 일을 했다면 박수와 축하를 받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거기에 이름을 내 건 수많은 단체와 기업에서 연말연시 음주운전 하지 말자고 현수막 한 장 내걸어 달라는 부탁에 어떻게 했는가 ! 참으로 인색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 협조하지 않았다. 지역사회가 번듯하게 발전하는 이면에는 상대적으로 낙후되고 곪아 있는 문제가 누적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음주운전을 유유히 즐기는(?) 수많은 시민들의 일탈을 오로지 경찰에 내 맡긴채 모두가 수수방관하는 데도 과연 살기좋은 도시라고 자랑할수 있을까 ? 포퓰리즘에 젖어 거창한 구호만 요란하게 떠들면서 그냥 묻어 버리고 넘어 가는게 하도 안타까워서다.

이동열  skj633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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