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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가 길게 우는 것도 목이 길어서인가요"
제201호

정탁(鄭琢)선생은 1526(중종 21)~1605(선조 38)까지 80세를 살면서 많은 업적을 남긴 분이다. 자(字)는 자정(子精)이요 호(號)는 약포(藥圃)이며 시호(諡號)는 정간공(貞簡公)이며 청주(淸州) 정씨이다. 이 이야기는 약포선생이 벼슬하기 전 처가(妻家)에 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약포선생은 생긴 몸집도 왜소한데 용모도 옹종하여 볼품이라고는 내놀데가 없는데다가 집안도 한미(寒微)한 형편이었다. 게다가 약포선생의 동서(同壻)들은 생김도 훤출한데다가 집안들도 모두 좋아서 처가 식가들이 약포선생을 내놓고 멸시하고 푸대접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다가픈 사위 입장인데 이렇게 무시를 당하니 약포선생은 심사가 뒤틀린데로 뒤틀린데다가 이번에는 여러 사위들을 한 방에 모아 놓고 밥상을 차려 내오는데 다른 사위들의 밥상은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진수성찬인데 약포선생의 밥상은 개다리 소반에 맨밥에 냉수 한사발 나물 반찬 두어개만 달랑 올라 있었다. 속으로는 부아가 치미나 그렇다고 양반출신으로 장인과 손위 동서들 앞에서 밥상을 뒤엎을 수도 업속 벌레씹은 표정으로 밥 한숟갈 입에 넣고 모래씹듯 우물거리고 있다가 반도 못먹은 밥상을 물리고 말았다. 모두가 밥상을 물리자 장인은 여러사위들을 둘러 앉혀놓고 글 재주를 시험하였다. "자 내가 이제 글 귀를 하나 제시할 터이니 자네들 중에서 대구(對句)를 맞추어 보게. 잘한 사람에게는 내가 후한 상을 주겠네" 여러 사위들은 장인을 둘러싸고 앉아 온갖 신경을 곶추세워가며 장인의 입에서 떨어질 글귀에 긴장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글귀흘 내 보겠네. 산지고야(山之高也)는 석다고(石多故)라. 산이 높은 것은 돌이 많은 까닭이네" 그러자 여러 사위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피뿐 대구를 내놓는 자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약포선생이 대구를 던졌다. "그렇다면 천지고야(天之高也)도 석지다(석지다(石之多)오? 그러면 하늘이 높은것도 돌이 많아서 그렇단 말입니까? 한 방 맞은 장인은 당황하며 또 다시 글귀를 던졌다. "학지장명(鶴之長鳴)은 항장고(項長故)라 즉 학이 길게 우는 것은 목이 길어서 그런 것이니라" 그러자 약포선생이 즉시 답하였다. "그렇다면 와지장명(蛙之長鳴)도 항장고(項長故)인가요. 즉 개구리가 길게 우는 것도 목이 길어서 그런가요? 이젠 장인이 죽을 노릇이었다. 우습게 보았던 막내사위의 그 재주는 여러 사위들을 제쳐놓고 단연 압권이었다. 열이 받힌 장인은 흥분하여 또 한마디를 던졌다. "노류부장(路柳不長)은 열인고(閱人故)라 즉 길가의 버드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어루만져서 그런 것이니라" 그러자 약포선생은 즉석에서 또 답변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장모부장(丈母不長)도 열인고(閱人故)입니까? 즉 우리 장모님 키가 작은 것도 여러 사람들이 어루만져서 그런 것인가요? 일이 이쯤 전개되자 여러 사위들도 약포선생의 재주에 경악하였고 장인은 그동안의 실례(失禮)했음을 거듭 사죄하며 막내사위에게 예를 다하여 극진히 대접했다 한다. 이 약포 정탁선생은 33세가 되던 1558년에 늦깎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좌의정까지 올랐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선조(宣祖)를 호종(扈從:모시고 다니는 것)하였고 왜란이 평정된 후 이 공으로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었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남명(南溟) 조식(曺植) 두 선생으로부터 사사(師事)하여 경사(經史)·천문(天文)·지리(地理)·병가(兵家)에 달통(達通)하는 등 큰 선비로 추앙받았다. 박명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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