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호

근세 조선 중후기인 숙종임금 때 충청도 단양고을의 어느 산골 동네에 대단한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동네 보잘 것 없는 어느 상민이 부친상을 당하여 빈소(殯所)를 모셔놓고 3년상을 치루는데 그 빈소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대감이 직접 지은 친필로 된 만장(輓章)이 걸려있는 것이었다. 우암이라면 당대의 실권자요 명재상이며 노론(老論)의 영수(領首)였으니 한 고을을 뒤집을 정도의 큰 사건이었다. 더구나 우암은 효종(孝宗) 승하시(昇遐時)에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복(服)을 입을 때 효종을 장남으로 보느냐 차남으로 보느냐에 따라 상기(喪期)가 달라지는데그의 명확한 예론(禮論)과 뚝심·오기를 총동원 하여 한시코 차남으로 처리하면서 반대파를 꺾어 누른 대단한 인물로 특히 예(禮)만큼은 까다롭고 확실한 주관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 보잘 것 없는 시골 상민의 빈소에 그의 만장이 걸려진 것을 우연히 지나던 같은 동네 노진사가 보고 문제를 삼은 것이었다. 노진사가 처음 발설을 하자 아무도 믿지 않고 노진사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다가 급기야는 여러사람들이 그집 빈소를 직접 찾아가 확인하고 나서야 눈을 더욱 휘둥그레져서 단양 군수에게 보고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이만장의 진위여부(眞僞如否)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상주를 불러 물어보니 한사코 사실이라고 우기니 마침내 군수가 한양에 있는 우암 대감에게 직접 물어보게 되었다. 단양군수로부터 이 질문을 받은 우암은 빙그레 웃으며 그 만장은 본인에 의하여 지어진 것이라고 확인하여 이 소동은 일단락 되었다. 그러면 어찌하여 당대의 세도가인 우암과 시골의 이 상민과는 무슨인연으로 만장을 지어주게 되었는가? 만장이란 원래 망인(亡人)과 친한 사람이 그의 죽음을 애도(哀悼)하여 그의 생애(生涯)에 맞게 짧은 글을 지어 빈소에 두었다가 탈상(脫喪)때 산소옆에서 태우는 것이다. 이 사연은 이렇다. 망인(亡人)의 아들 삼형제는 부친이 별세하자 그동안 상민으로 남들로부터 멸시만 받아온 것이 한이되어 이 기회에 당대의 최고 실력자인 우암대감으로부터 만장만 받는다면 그들의 신분은 급상승할 것이 너무나 당연하였다. 그래서 이 상주 삼형제는 부친이 죽었어도 발인(發靷)조차 하지 않고 곧바로 상경하여 우암대감을 아침에 대문이 열리자마자 찾아가서 대감을 뵈러 왔노라고 말하니 문지기가 청을 들어줄리가 만무하였다. 이들이 계속 조르다가 문지기에게 심하게 맞았으나 비명(悲鳴)을 질러 가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자 대문은 자연 소란스러워지게 되었고 기침(起寢)한 우암대감의 귀에도 들려서 이들을 불러 사연을 물어보게 되었다. 상주 삼형제는 일의 자초지종을 상세히 아뢰고 잘못된 일인줄 아오나 목숨을 걸고 부탁드린다고 하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이 간절한 소원을 들은 우암대감은 빙그레 웃으면서 즉석에서 승낙을 하고 만장을 지어 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생이생부지(生而生不知) 사이사부지(死而死不知) 생사도부지(生死都不知) 평생한부지(平生恨不知) 살아도 산 것을 몰랐으며 죽어도 죽은줄을 몰랐네 살고 죽음을 도대체 몰랐으니 평생의 한도 몰랐었네. 역시 우암 다운 모습이다. 4행 20자 속에 할말은 다했으며 불쌍한 시골 상민의 한도 들어주었으니 말이다. 오늘날에도 어렇게 멋있는 관료들이 있다면 미담(美談)감이 될텐데... <문학박사 박희> 박명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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