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호

지난 2회에 맹사성 정승이 충청도 천안에서 유숙하며 젊은 부부의 제사지내는 모습을 이야기 한 바 있다. 이번에는 충청도 제천지방에서 있었던 제사 이야기이다. 제천 어느 동네에 우애가 돈독한 4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오늘 저녁이 마침 돌아가신 아버님의 제사드는 날이었다. 그런데 하나 큰 문제가 생긴 것은 다름아닌 해마다 제사때 축문(祝文)을 써서 직접 참사(參祀)하여 독축(讀祝)해 주던 오첨지 영감님이 출타하여 귀가하지 않은 것이었다. 본래 이 집은 아버지가 남의 머슴살이를 하다가 죽은 무식한 사림이어서 아들들도 역시 글을 배운 적이 없으니 제사에 축을 쓰고 읽을 사림이 없어서 오첨지의 덕으로 제사를 지내오던 중에 낭패를 당하게 되었다. 이 오첨지는 지체가 그다지 높지 않은 향반(鄕斑)으로서 반상(斑常) 구별없이 아무에게나 스스럼없이 대해주어 항상 감사해 하여 이 어른덕으로 제사를 잘 모셨는데 아무리 무식한 집안이라도 조상 제사만큼은 축을 읽는 등 격식을 갖추는 것이 예의라고 여겼던 것이다. 낮에 네 형제가 머리를 맞대고 상의를 했으나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던 중에 그중에서도 생각이 민첩한 세째가 이렇게 제안하였다. "할 수 없습니다. 김진사 어른께 부탁드립시다" 그러자 나머지 셋이서 고개를 저으며 "얘야 그 어른은 지체도 높고 깐깐하고 무섭기가 말도 못하는 노인인데 감히 무례한 부탁을 드렸다가 제사도 못지내고 경을 치려고 그러느냐?" "형님들 아무리 김진사께서 그러한 성품이라 한들 조상모시는 자손된 입장을 잘 말씀드리고 정중하고도 간곡하게 부탁드린다면 그분이 들어 주시겠지요. 이렇게 겁만 먹고 망설이지 말고 가서 부탁이나 드립시다" "그 말도 맞는 것 같다. 우리 모두 김진사 어른을 같이 뵙고 부탁을 드려보자" 드디어 네 형제가 같이 가서 김진사께 무례함을 용서해 달라고 하여 부탁을 드렸다. 김진사는 흔쾌히 허락하였다. "그게 뭐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라고 미안해 하느냐? 알았다. 내 저녁 제사때 너의 집으로 갈 것이니 그리알고 돌아가거라" 네 형제는 한없는 감사의 뜻을 표하고 돌아와 밤이되자 제사상을 진설(陳設)하고 김진사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자시(子時)가 되자 김진사 들어오더니 "제사 준비는 다 되었느냐? 그럼 절하고 강신(降神)하여라. 또 초헌(初獻)하여라. 이제 독축할테니 모두 꿇어 앉아라" 하더니 김진사는 어깨쭉에 차고 있던 장죽을 빼서 신위를 향해 휘젓으면서 이렇게 망인(亡人)의 이름을 불러가며 말했다. "네 이놈 돌쇠야 차린것은 별로 없다만 실컷 먹고 잘 가거라. 그리고 내년에 또 보자" 하더니 김진사는 "이제 독축은 끝났으니 너희들끼리 제사 잘 모셔라"하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휘적휘적 밖으로 나가는게 아닌가! 아연실색할 노릇이었다. 성미급한 막내가 김진사를 후려 패려고 일어서려는 것을 맏이가 잡아 앉히며 "제사나 다 모시고 보자"하여 제사를 마치고 철상을 하였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세 동생들이 당장이라도 김진사 댁으로 쳐들어 갈 것 같아서 맏이는 "얘들아 음복이나 하고 보자" 음복을 마치자 또 "얘들아 제사를 모시고 곧바로 무슨 일을 저지르면 아버님께 누가되니 오늘은 그만 자고 이 일은 내일 상의하자"라고 하며 그날밤을 무사히 넘기고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났다. 네 형제들은 간밤 꿈이야기를 서로 나누어 보니 어쩌면 똑같은 꿈이었는데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얘들아 어제밤 제사는 내가 죽은 이래 제일 잘 얻어먹은 제사였느니라. 작년까지 내 제사에 가보면 살았을때 함부로 말도 못붙이던 오첨지 어른께서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유세차 어쩌구 저쩌구 하시니 말귀도 못알아들어 당황하다 보면 이내 제사상을 철상하면 매번 굶고 갔었다. 그런데 어제 김진사께서 ＇돌쇠야 실컷 먹고 가라＇고 하시니 얼마나 기쁜지 잘 먹고 돌아왔느니라" 네 형제들의 말이 "제사도 격에 맞아야 하는가 봐요"하며 김진사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갔다. 박명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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